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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대로' 하자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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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아파트 동대표 홍씨가 고래고래 소리친다.

"이건 무효야, 무효! 소집 절차와 서명부 작성 과정이 적법하지가 않다고! 이런 인민재판식의 결정을 난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어! 법대로 하라고, 법대로!" 아파트 부녀회장과 통장이 전날 주민 임시회의에서 가결된 동대표 불신임 서명부를 제시하자 홍씨가 강력히 반발한다. 요절한 작가 김소진의 단편소설 '쐬주'의 일부분이다.

1970년 서울 평화시장의 피복공장 재단사이던 22세의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지켜라"고 외치며 자신의 몸에 휘발유를 끼얹었다. 청년의 죽음은 청계피복노조를 시작으로 70년대 2500여 개의 노조가 결성되는 데 기폭제 역할을 했다.

다수의 힘에 부당하게 밀린다고 생각한 홍씨와 사회적 약자로서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요구하는 전태일이 마지막으로 의지한 것은 '법대로'였다. 이때의 '법대로'는 '공정하게' '억울함 없이'등의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될 때도 있다. 독재를 합리화하거나 민주주의를 탄압할 때도 법은 앞세워졌다. 힘은 있으나 정의롭지 못한 경우 법의 가면 뒤에 숨는 것이다. 이때는 '정권 마음대로'라는 말과 동의어다.

지난주 대한항공 조종사 노조가 파업하면서 "법대로 하자"고 주장하고 나섰다. 비행훈련 심사 축소, 정년 연장, 조합원 징계 완화 등을 요구하면서 활주로나 계류장으로 이동할 때 저속 운항했다. 이른바 준법투쟁이다. 이 때문에 대구공항에서는 공군 전투기가 제대로 비행훈련을 못하는 등 차질이 생겼다. 인터넷에는 '귀족노조의 파업' 등의 비난이 잇따랐다.

법을 지키는 것이 마땅하고 옳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준법투쟁'이라는 말이 사용되니 혼란스럽다. 그동안 노동현장에서 얼마나 불법.탈법이 성행했기에 '준법'만으로 사용자에 대한 실력행사의 수단이 되는 것인지 의아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알고 보면 준법투쟁은 파업 때마다 단골로 등장하는 메뉴다. 택시.버스 운전기사들이 자신과 승객의 생명.안전을 명분으로 관행으로 자리 잡은 과속, 부당요금 징수, 합승행위, 승차거부 등을 하지 않거나 근로자들이 집단적으로 연.월차 휴가를 내거나 휴일근무 또는 시간 외 근무를 거부하는 것 등이 준법투쟁의 대표적인 유형이다.

준법투쟁은 태업(怠業)과 유사한 쟁의행위로, 사용자 입장에서 볼 때 업무방해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그러나 쟁의행위는 단체행동권의 일부분이며 단체행동권은 단결권.단체교섭권과 함께 헌법이 보장하는 노동 3권이어서 쟁의행위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모두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정당한 쟁의행위가 되기 위해서는 그 주체가 단체교섭을 체결할 능력이 있는 노동조합이어야 하고, 목적이 근로조건의 유지.개선 등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또 근로자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사용자가 단체교섭을 거부하거나 요구사항을 거부한 뒤 개시할 수 있고 노동쟁의 발생신고 등 적법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 폭력이나 파괴행위 등을 동반해서도 안 된다(대법원 1994.9.30 선고 94다4042판결 등).

이런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준법투쟁은 형법상 업무방해죄가 된다. 법대로 하자고 시작한 것이 결과적으로 법을 어기게 되는 것이다.

독일의 법학자 옐리네크는 '법은 도덕의 최소한'이라고 했다. 법을 지키지 않고서는 사회가 제대로 존립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그러나 '법대로 하자'는 주장이 많아지는 것은 결코 바람직스럽지 않다. 대화나 협상을 해봐야 기대할 것이 없다고 생각될 때 최후의 카드로 나오는 것이 '법대로'다. 여기에는 인간적인 관계까지 끊겠다는 결연함이 내포돼 있다. '법대로'는 복잡다단한 사회를 지탱해나가는 필요조건일 뿐이며 충분조건은 아니다. 법이 강조될수록 인간미나 따뜻함이 들어설 여지는 그만큼 줄어든다. 이번 조종사 노조의 준법투쟁을 지켜보면서 옳음과 그름을 따져보기에 앞서 씁쓸한 기분이 드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김상우 미디어기획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