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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움 지나쳐 두려움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등잔 밑이 어둡다』고 뉴스를 다루는 이들 가까이에 살고 있으면서도 나는 비교적 세상 풍문에 더딘 편이다.
그래서 4천만 대한민국 국민들을 하루아침에 소금에 절인 배추처럼 잔뜩 기운 빠지게 한 이번 소위 『장 여인 사건』도 며칠 전 TV저녁 뉴스를 통해서야 처음 알았다.
그것도 왔다 갔다 집안일을 하면서였으므로 뉴스가 터져 나온 첫날은 『또 웬 통큰 여자가 몇 억쯤 사기를 쳤거니…』하는 정도로 건성 들어 넘기고 말았었다.
그러나 갈수록 태산이라고 계속 터져 나오는 매일 매일의 메거톤급 속보들을 보고 듣자니 좁은 가슴 가득 화가 부글부글 끓어올라서 이러다가는 심장이 폭발하는게 아닌가 한편으로 슬그머니 걱정이 될 지경이다.
도대체 이런 기도 안찰 일이 어떻게 해서 일어날수 있다는 말인가! 그 여자가 미모에다 화술이 능하다고는 하지만 신문사진에 의하건대 그쯤 잘생기고 말 잘하는 여자야 돌아보면 세상에 흔하고, 거액의 위자료를 받고 두번씩이나 이혼하고 세번째 결혼한 것 빼고는 별로 이렇다 하게 내세울 이력도 없는 44년생 내 동갑나기에 불과한 여자가 아닌가!
아무리 큰손을 가진 여자라지만 손이 크면 얼마나 컸길래 이토록 세상을 놀라게 하고 온 국민을 맥빠지게 하는 걸까. 우선 신문지상을 오르내리는 돈의 단위를 보면, 평범한 주부인 나에게는 너무나 엄청나 어찌된 것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이혼 위자료가 1억원이니, 5억원이니 하는 것도 놀랍거니와 1개에 2억원이 넘는 청자 값, 나아가 견질 어음 2천48억원에 까지 이르면 도대체 무슨 천문학적인 숫자놀음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나와 똑같은 나이인 44년생이고 같이 6·25를 겪고 어려운 시대를 살아오면서 서울에서 여학교와 여자대학을 나왔다는 동시대인에게서 느낄 수 있는 나름의 동질성이랄까 친근감 같은 것은 눈 씻고 찾아봐도 전혀 없는 것 같다.
이 사건이 며칠째 신문에 대서특필된 어느 날 아침 나의 여고 친구가 전화를 걸어왔다. 『얘, 같은 나이에다 공부를 많이 해도 우리가 더 많이 했을 텐데… 우리는 이게 뭐냐』 물론 다소의 과장이 섞였지만 우리들의 대화는 사뭇 자조적인 것이었다.
나는 최근 한달에 4만원씩을 월급에서 뗀 3년 짜리 재형저축으로 2백만원을 탔다고 자랑스럽게 나에게 얘기하던 친구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 그 친구는 일류 여학교, 일류 대학을 나온 후 치열한 입사시험을 거쳐 취직했고 10여년째 근무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아주 선택받은 환경에서 뛰어난 재질을 가진 그에게도 2백만원이란 아주 큰돈이고 힘들게 마련한 돈임을 나는 알 수 있다. 어디 그 뿐이랴. 매일 시장에 나가 10원, 20원짜리 파 값, 콩나물 값으로 실랑이를 벌이는 알뜰한 서민주부가 우리 주변에는 너무 흔하다.
그런데 그 여자의 그 엄청난 허풍과 허세는 도대체 어찌하여 그리 쉽게도 통할 수가 있었으며, 대접 받을 수 있었단 말인가. 이것이 바로 권력에 약하고 금력에 약한 우리 사회 저번의 수준을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 싶다. 나름대로 각고의 노력으로 자신의 사업을 쌓아올렸던 이름난 사업가들이 번 돈의 배가 넘는 어음을 떼어줬다는 사실들은 무언가 필유 곡절이 있었음을 우리와 같은 평범한 주부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렇지 않다면 도저히 광태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그 뻔한 허세와 속임수가 어찌 통할 수 있단 말인가. 놀랍고 또 놀라울 뿐이다.
그리고 열심히 한두푼을 절약하며 성실히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선량한 서민들의 기운용 빠지게 만드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그 여자가 저지른 일견의 광태는 결국 우리국민 모두가 떠맡아 수습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우리를 노무 화나게 한다. 어쩌면 이런 일이 비단 장 여인 한사람만의 예기가 아닌지도 모르겠다 .단지 그의 예기는 표면화되어 알려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는 의식개혁의 운동이 한창이다. 무엇부터 의식개혁을 할 것인가. 권력을 가진 사람, 금력을 가진 사람, 그리고 그 주변에서 서성거리는 사람부터 의식개혁은 시작돼야 한다.
그들의 터무니없는 허세와 권위 의식과 금전공세에 얼마나 많은 선량한 서민들이 기죽고 살아왔던가. 이제 우리는 이들 정직하고 선량한 사람들이 어깨 펴고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이경순<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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