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사채파동 경계할 때"|「자영인 대하 사채드라마」의 시말과 문제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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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장 여인 사건의 조짐이 어렴풋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지난 1월말. 공영토건과 일신제강 등의 어음이 대량으로 나돌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이들 업체의 어음에는 일단 『요주의 적색경보』가 내려졌다. 그 이후 이들 두 업체의 어음은 유통이 어려워지고 할인율(이자율) 도 자꾸 높아만 갔다.
평균 이자율 월 2.5%선을 맴돌던 공영토건의 어음이 2월 들어서는 3.0%로 높아졌고 4월에는 3.5%로 덤핑되는 사태로 악화되었다. 사채업자는 물론 증권·금융계가 바짝 긴장했다.
장 여인과 관련기업의 어음이 사건화 되어 터진 것은 4월말이다.
공영토건의 거액어음이 상업은행 광화문지점으로 돌아왔으나 공영은 이 어음에 대해 사취 (사기)어음이라고 주장, 결제를 거부했다.
이것을 제기로 장 여인이 돌린 공영토건·일신제강·삼익주택·라이프주택·태양금속·해태 등의 어음이 은행창구로 몰려들었고 은행은 부도를 유보한 채 당국의 처분만을 기다렸다.
검찰은 어음의 사취여부를 수사하기 시작했고, 이를 계기로 증권시세는 폭락하고 사채시장은 마비상태에 이르렀다. 은행은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감지하고 도화작업에 나섰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공영토건의 비운은 해외건설업계, 나아가 우리 경제의 취약성이 그대로 나타났다는 점에서 이번 사건은 끝이 아닌 시작인지도 모른다.
공영은 최근 들어 두드러지게 성공한 신진 건설업체.
공영이 사채를 쓰게 된 것은 중동 어느 나라에서 주택공사를 마무리했으나 하자가 있다는 이유로 공사대전을 받지 못하면서부터.
공영이 받을 돈은 약 9천만달러(6백30억 원)이며 공사를 계속하거나 새로 할 물량은 6억 달러(약 4천2백억 원)가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공영이 중동에서 공사를 마치고도 공사대전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비단 공영뿐만이 아니라 우리 해외건설이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거의 공통적으로 겪고 있다는 점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중동의 여러 나라들이 최근 석유수출이 잘 되지 않자 갖가지 이유를 붙여 공사대전을 깎거나 지급을 지연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번 사건에 라이프·삼익주택 등 해외건설업체들이 많이 관련됐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중동경기가 냉각되면서 국내업체들의 수익성도 현저히 떨어지고 있다. 이미 많은 장비와 인원을 중동에 갖다 놓았고 대개 몇억 달러씩의 은행 지보를 받고 있는 해외건설업체가 한번 기우뚱하면 그 파문은 심각하다.
장 여인이 문제와 6개 기업으로부터 받아 낸 어음은 모두 2천6백24억 원이다. 이중 실제 돈이 나간 것은 5백76억 원 뿐이다.
사채를 빌고 빈 돈의 2∼7배의 어음을 끊어주는 기업인이나 돈을 꾸어 준다는 얘기만 듣고 92억 원의 어음을 끊어주는 기업인의 정신을 이해할 수 없다. 어쨌든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 현실이다.
장 여인이 은행돈을 자기 돈 같이 쓰는 것을 보고 기업들이 공신력을 부여했던 것 같다. 마음놓았던 것이다.
장 여인의 드라마가 실패하게 된 배경에는 장기불황으로 인한 증권시장의 침체가 주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증권시장이 계속 활 황이었다면 사건은 좀더 뒤늦게 터졌을지도 모른다.
여자 한 사람이 우리나라 경제질서를 뿌리째 뒤흔든「장 여인의 사채파동」사건은 그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여건에 더욱 큰 문제가 있다.
장 여인이 쥐고 움직인 돈은 우려나라 전체 통화량(현금과 요구 불 예금만을 합친 M1기준)의 6.4%에 해당한다.
장 여인은 천문학적인 이 거금을 기업과 은행을 상태로 공 굴리 듯 놀이를 했다.
장 여인의 돈 장난은 기업과 은행의 약점을 최대한 이용하는데서 착안됐다. 우리나라 기업은 자기자본비율이 평균 18%(80년 한은 기업경영 분석), 즉 자기자본의 5배를 넘는 타인자본 (빚)으로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그 결과 만성적인 자금부족에 허덕일 수밖에 없고 이자의 고하에 관계없이 돈을 조달하기에 급급한 실정이다.
그동안 금리를 계속 내려 국제금리보다 낮게 했어도 실제 기업들은 고리의 사채를 많이 써 낮은 공 금리의 혜택을 못보고 있다는 뜻이다. 돈을 비교적 잘 번다는 해외건설회사가 이러니 다른 기업들은 말할 것도 없다.
기업 측으로 보아선 낮은 금리로 은행돈을 못 쓰느니 보다 금리가 다소 높더라도 여유 있게 돈을 쓰는 것이 더 좋을지 모른다.
은행돈을 쓰려면 예금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정부당국에서 대출과 관련하여 예금을 강제 못하도록 하고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악성의 양건예금은 그래서 생겨나는 것이다.
장 여인은 사채놀이에 권력의 심리를 이용하는 수법마저 동원했다.
은행에 대해서는 모 유력자가 뒤를 봐준다고 했으며, 기업에 대해서는『모 특수자금을 대고 있다』는 얘기를 늘어놓기도 했다.
이러한 기업과 은행의 약점, 그리고 권력의 심리를 원용할 수 있었던 여건은 장 여인의 대하 사채드라마를 창출해 낸 것이 아닌가.
이러한 부조리의 온상이 존속하는 한 제2의 장 여인이 안 나온다고 누가 보장할 수 있겠는가.
2천여 억 원을 가볍게 움직인 장 여인의 사채파동은 국민에게 돈에 대한 생각, 근면노력에 대한 가치관을 근본적으로 뒤틀어 놓았다는 점에서도 그 후유증은 오래갈 수밖에 없다.
몇천 억 원을 한 여자가 굴릴 수 있었다는 이 현실, 그것은 듣는 사람 모두에게 커다란 공동을 만들어 주고 있다.
또 하나의 남은 과제는 정부가 어떻게 제도적으로, 그리고 실천적으로 부조리의 온상을 척결할 것인가에 있다. 금융의 허점을 노리는 사람은 무수히 있다.
기업의 투자자금으로 쓰기보다는 사채를 놓아 이자를 따먹는 것이 훨씬 유리하고 가난한 월급쟁이에게는 꼬박 세금을 받아들이면서 거금을 버는 전주로부터는 세금을 제대로 거두지 못하는 금융·세제상의 문제점은 시급히 고쳐져야 한다.
뒤에 숨어서 무기명으로 은행예금을 하고 증권투자를 하고, 그리고 돈 장난을 하는 사람들을 계속 비호하려고 한다면 부조리온상의 척결은 끝내 공염불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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