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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얼굴 없는 전주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1조원의 지하경제, 사채시장을 움직이는 큰손들은 누구인가?
사채의 전주들은 결코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전주를 밝히려는 노력은 세금을 물리기 위해서 국세청에서, 그리고 금융실태파악을 위해 금융계에서 여러 번 시도되어 왔다.
그러나 사막의 신기루처럼 막상 다가가면 안개처럼 사라지곤 한다.
72년 8·3조치(사채동결 령)로 된서리를 맞은 뒤로 사채의 전주들은 더욱 깊숙이 숨어 철저한 위장을 하고 있다.
사채조직은 철한 점 조직이다.
필요한 돈과 전주 실력에 따라 중간 단계가 생략되기도 하지만 사채조직은 원칙적으로 대 전주→중간 전주→본 브로커→중 브로커를 거쳐 기업과 연결된다.
철저한 점 조직으로 3∼5단계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베일 속에 가린 얼굴을 찾아내기란 지극히 어렵다.
국세청이 세금(병 배세)으로 거둬들인 것을 역산해 봐도 잡히는 것은 전체 사채의 10분의1밖에 안 된다.
물론 특수범죄수사를 하듯 일망타진하려면 불가능한 것은 아니겠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 심각하다.
그러기에 필요악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해방 후에는 광산 왕 소리를 듣던 C씨가, 60년대에는 어느 제지회사의 D씨가 사채시장의 큰손으로 통했다.
또 개성사람중심의 개성그룹, 평안도중심의 어느 교회그룹, 모 학원그룹, 모 종교단체의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다.
월남 특수경기로 큰돈을 번 H그룹, 철강으로 유명한 D그룹 등 이 한때 대 전주로 활약한 적도 있다고 한다.
또 최근 몇 년 전에 자기사업을 몽땅 처분한 W그룹의 L씨도 상당한 돈을 굴리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재계에서 이름이 널리 알려진 모씨에 따르면 10·26이전에는 대전주의 수가 몇 명 안되었지만 그 금액은 컸으나 10·26이후는 전주 수는 는 대신 한 전주가 움직이는 돈의 규모는 적어졌다고 말한다.
오랜 불황으로 기업들이 어려워지고 특히 중동경기침체로 건설회사들이 흔들거리자 전주들은 기업에 돈을 주기보다 신종어음(CP)·보증사채·투자신탁 등에 투자하는 경향이 많아졌다. 고리보다 안전성을 중시하는 것이다. 투신이나 회사채 등은 공인된 것이어서 절대 탈이 날 우려가 없다.
그러나 고리의 매력 때문에 아직도 단자 등을 매개창구로 하는 안전성이 보장된 사채에는 옛 실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얘기다.
현재는 사채전주가 무척 다양하다 한다.
77, 78년 후반에 불었던 이상경기에 편승, 부동산 투자와 증권 붐으로 한몫을 잡은 사람, 이런 저런 이유로 기업을 정리해 현금으로 챙긴 사람, 퇴직금을 굴리는 사람 등.
그러나 금융계 및 재계 관계자들의 말은 전직고관 등 구정권의 권력층 주변 사람들이 새로 등장했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이런 얘기를 뒷받침하는 소문으로는 10·26사건 직후 모씨가 죽자 재계와 금융계에서는 어느 합섬회사가 몇십 억 원의 돈을 갚지 않아도 됐다고들 했다.
권력의 핵 주변에 있는 실력자에게 교제용으로 사채를 빌어 썼는데 전주가 비명에 갔으니 갚지 않아도 증표가 없을 것이라는 얘기들이었다.
재계와 금융계에서는 이런 소문이 상당히 광범위하게 유포 됐으나 물론 확인된 것은 아니다.
이번에 사채쇼크를 몰고 온 장 여인의 돈도 그 원천이 어디이며 그 많은 돈이 어디로 흘러 갔겠는 가에 대한 의혹들이 많다.
대검에서 수사를 계속하고 있고, 재무부도 자진해서 국회재무위를 열어 줄 것을 요청, 곧 재무위가 알릴 테니 두고 볼 일이다.
특히 민한당은 물론 여당인 민정당도 이번 사건을 철저히 규명하겠다고 벼르고 있으니 세인의 부질없는(?) 의혹은 곧 밝혀지리라고 기대를 해봐야겠다.
당국의 지금까지 조사결과로는 장 여인의 돈은 증권투자 실패와 이에 따른 사채이자(장 여인은 약 1년 전부터 전주 겸 차주로 돌아섰다)로 나갔다고 한다.
증권으로 2백억, 이자로 2백억 등 4백억 원을 날렸다는 소식이다.
사채가 꼭 급전마련만을 위해서 있는 것은 아니다.
일부 악덕기업인이 자기회사에 자기 돈으로 사채를 놔 고리의 단물을 빼먹기도 하고, 높은 분의 재산증식용으로 곧잘 이용된다.
앞의 것은 위장사채라 하고 뒤의 형태를 교제사채라 한다.
교제사채는 어느 기업이 권력층이나 관리 등 사업상 필요한 사람과 긴밀한 유대를 맺고 싶을 때『돈 있으면 우리 회사에 맡기시오. 고리로 잘 길러 드릴 테니』하는 방식을 취한다.
회사로서는 고리의 사채가 필요 없음에도 사업상의 방패막이로 매월 고리의 이자가 꼬박꼬박 지급된다.
엄격히 말해 뇌물 적 성격도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기업과 실력자는 관계가 더욱 돈독해지고, 사채를 둔 실력자는 그 회사를 보호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교제용 사채는 그 실력자가 그 자리에서 그만두는 등 이용가치가 없으면 얼마후 원금이 반환되고 관계는 끊기는 것이다.
그러나 이즈음 심각한 문제는 기업주자신이나 그 가족들이 자기 기업에 사채를 넣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런 풍토는 불경기 등으로 사업전망이 밝지 못한데다 실사 이익을 냈더라도 세금 등을 생각하면 오히려 안전한 사채가 낫다는 발상이다. 자기기업에 놓는 것이니 떼일 염려 없고 경리담당자만 믿을 만한 사람을 채용하면 비밀이 보장되고….
기업주가 자기 몫의 주식을 심복에게 위장 분산시키는 경우보다 이 경우는 더욱 영향이 크다.
기업주는 단물을 빨고 회사는 자꾸 시들어 가고…. 이러한 반사회적 풍토는 세제 등 제도적 개선도 필요하지만 기업주들의 의식도 문제다.
회사가 기우는 기미가 있으면 알짜는 가속적으로 빠진다. 내부로부터의 붕괴인 것이다.

<박병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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