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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은행 앞지른 정보망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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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일부 사채업자들은 장 여인이 돈을 꿔 주던 전주에서 돈을 꾸러 다니는 차주로 변한 것은 증권투자실패가 근본원인이기는 하나 이것이 사건화 된 직접적인 계기는 거액의 돈을 빼돌렸던 조흥은행 명동지점차장 김상기씨의 자살이라고들 한다.
김씨는 돈 많은 전주들의 예금을 자신이 근무하던 은행에 끌어들이면서 예금주 몰래 돈을 빼내 쓴 뒤 감사에 걸리자 자살했다.
이리한 사실이 조흥은행의 자체감사에서 적발되면서 다른 은행에서도 은행이 차주와 전주를 연결시키는 악정 양건예금에 대한감사를 강화했다.
증권투자 실패 등으로 이미 전주에서 차주로 돌아선 장 여인은 관례(?)에 따라 자신이 거래하던 조흥은행 B지점, D지점 등에 필요한 금액의 6∼7할을 예금시켜 줄 테니 돈을 꿔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감사를 의식한 은행은 이를 거절했고 따라서 돈에 몰린 장 여인은 담보로 잡았던 기업의 견질 어음을 사채시장에 내다 팔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금융기관과 전주와의 끈끈한 관계가 무너진 것이다.
(견질 어음이란 한 마디로 담보어음, 즉 사채업자에게 1억 원을 빌 때 1억 원 짜리 어음을 두 장 끊는데 이중 하나는 보관하고 있다가 돈을 갚으면 되돌려 주는 것으로 관례화 된 것은 아니다).
단자회사가 특히 심하지만 은행 등 금융기관에서 10억 원을 대출 받으려면 대출 받으려는 사람은 돈 많은 전주에게 부탁, 6억∼7억 원을 그 금융기관에 예치를 해야 되는 것이 관례다. 이를「조성」이라고 부른다.
이른바 양건예금이며, 사채업자와 기업의 연계는 여기서 출발한다.
기업이 사채를 얻게 되는 실례를 보자.
K건설 자금부장 김 모씨는 중역으로부터 1억 원의 급전을 마련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김 부장은 수첩을 꺼내 사채중개인 브로커「명동 이」씨에게 전화를 건다.
잠깐 기다리라던「명동 이」씨는 잠시 후 김 부장에게 자신의 사무실에 있는 명동 R호텔 코피 숍에서 만나자고 약속한다.
코피 숍에는「명동 이」씨의 사무실직원인 25세 가량의 여직원이 이씨를 대신해 김 부장을 만난다.
김 부장은 1억 원 짜리 융통어음을, 여직원은 선이자 2.3%를 제외한 9천7백70만원 짜리 수표를 서로 교환한다. 가장 기초적인 거래형태다.
브로커의 중개로는 0.025∼0.075%로 평균 0.05%가 관례.
그러나 사채거래는 단자를 매개기관으로 하는 것이 가장 많다.
즉 어느 회사가 1억 원의 급전을 필요로 할 경우 그 회사 경리담당자는 단자를 찾게 되고, 단자는 6천만∼7천만원의 예금을 끌어와야 1억 원의 돈을 빌려주는 것이다. 6천만∼7천만원의 예금은 돈을 꾸어 쓰려는 기업이 전주(사채업자)에게 부탁해야 하며 단자이자율과 사채이자율과의 차액을 따로 전주에게 줘야 한다.
전주는 입금액에 해당하는 만큼 단자어음을 사가는 것이 보통.
어음할인이라는 말보다「와리깡」이라는 일본말이 더 잘 통용되는 기업상대의 사채브로커들은 서울명동 소 공동 충무로 을지로 종로 등에 흩어져 있다.
대기업상대는 명동 소 공동이 중심으로, 사채시장에서 거래되는 돈은 하루 약 1백억 원 남짓 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을지로는 건재상이나 제지도매상들이 중소기업들의 어음할인을, 종로는『돈 급히 쓸 분』『2번 저당도 환영』이라는 신문광고를 통해 영업을 하면서 부동산 등을 담보로 잡는 고리대금업자들이 많다.
사채업자들이 사채규모를 약 1조원이 약간 넘는 것으로 보는 것은 사채거래기일이 보통 90일이기 때문이다.
즉 1백억 원이 한번 돌아오는데 90일이 걸리므로 9천억 원, 그리고 전문적인 사채시장을 거치지 않는 것을 약 1천억∼2천억 원으로 어림하기 때문이다.
사채거래는 전화 한 통으로 몇 천 만원, 몇 억 원의 돈이 신속하게 움직이는 철저한 신용사회다.
신용이 공인된 기업이면 하루에 몇 억 원 정도는 간단히 조달할 수 있다. 물론 담보는 어음 한 장으로 충분하다.
기업상대의 어음할인 브로커들은 부동산이나 전세권 등을 담보로 하는 사채는 취급하지 않는다.
브로커들은 전화 한 두 대에 여자직원 한 두 명을 거느리고 최소한의 좁은 사무실을 갖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들은 그들 나름대로 조직적이고 신속한 정보망을 갖고 있어 기업의 신용상태를 속속들이 알 수 있다.
그들끼리 사채거래를 하는 업체를 분담해서 서로 정보를 교환한다.
이들은 자신들이 돈을 빌려준 업체나 혹은 자신들이 담당한 업체의 자금담당자들과 늘 접촉을 하면서 정보를 서로 교환하는 것이다.
또 어느 기업이 관례에 어긋나는 돈을 빌겠다고 사채시장에 나타나면 사채업계에는 적색경보를 발동, 그 내막을 캐내는 것이다.
최근 장 여인 사건으로 문제를 일으켰던 기업들도 이미 사채시장에 적색업체로 낙인찍힌 업체다.
따라서 공연스레 버티고 앉았다가 한번 대출해 주면 상환기일까지 내팽개치는 은행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기업의 돌아가는 사정을 파악하고 있다.
어느 시중은행장은『사채업자들이 은행보다 기업의 속사정을 훨씬 꿰뚫고 있다』고 실토한다.
은행은 담보가 있으니 좀 느긋해도 되지만 사채는 일이 잘못되면 휴지와 같은 어음 한 장이 유일한 증표이기 때문이다.
사채이자율이 높은 것은 그만큼 위험성이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채시장에는 기업의 건실 도에 따라 등급을 매겨 놓고 이자도 차등 적용된다.
장 여인 파동이 있기 전에 A급(우량대기업)이 월 2.2∼2.3%, B급은 2.4∼2.5%, C급은 2.7∼2.8%선이었다. 이율은 기업신용 도와 더불어 시중자금사정에 따라 변한다.
신용이 없는 기업은 아무리 이자를 많이 준다 해도 발붙일 곳이 없다.
또 ABC급의 신용분류도 매일 달라진다. 수집된 정보로 신용등급을 재판정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자유경제의 원리가 적용되는 철저한 상업베이스다.
기업경영에 무슨 나쁜 조짐이 있으면 사채는 밀물처럼 빠져나간다. 사채에는 연체가 없다. 망하든지 갚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박병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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