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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광의 과학 읽기] 포연 자욱한 과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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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스탠리 큐브릭 감독은 SF의 고전이 된 영화 '스페이스 오디세이 2001' 첫 장면에서 동물의 뼈를 무기로 사용해 세력권 다툼에서 동료 유인원 집단을 초토화시킨 한 유인원의 우렁찬 포효를 보여준다. 다음 장면에서 그가 하늘높이 던져올린 최초의 도구는 지구 주위를 선회하는 인공위성으로 바뀐다. 어니스트 볼크먼의 '전쟁과 과학, 그 야합의 역사'(석기용 옮김, 이마고)는 바로 이 한 장면이 함축하는 내용을 인류 역사의 전개과정을 따라 소상하게 밝혀준다.

과학의 역사와 전쟁의 역사는 선후를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뒤얽혀있다. '전쟁은 만물의 아버지'라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은 오늘날의 과학자에 해당하는 그리스의 철학자들이 얼마나 헌신적으로 국가의 부름에 복무했는지 알게 되면 결코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탈레스는 조국 이오니아가 해양강국이 되게 하기 위해 자신의 천문학 지식으로 항법을 개발했다. 아르키메데스는 흔히 과학의 실용성을 경멸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열렬한 시라쿠사의 애국자였고 로마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병기창의 책임자로 고속 불화살 발사장치인 캐터펄드를 비롯한 수많은 최신식 병기들을 개발했다. 그밖에도 이 책은 그동안 알려져왔던 상식과 다른 과학의 전쟁 복무 이력을 무수히 들추어내준다. 가령 독일에서 원자폭탄 개발을 저지한 것으로 알려진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와 그의 '우라늄 클럽' 동료들이 실상은 기술적 문제로 원자폭탄 제조에 실패했을뿐 의도적으로 제조를 지연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그런 예에 해당한다.

그렇지만 이 책은 단지 과학과 전쟁의 야합의 역사를 서술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국제안보 전문기자로 기자상을 받기도 한 저자 볼크먼은 이 책 전체를 통해서 "왜 과학자들이 기꺼이 전쟁에 동원되는가? 그리고 왜 범죄적 행위에 아무런 문제제기도 하지 않는가"라는 물음을 던지고 있다.

그 답은 멀게는 정복전쟁을 뒷받침하기 위해 처음 과학을 제도화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에서 시작해서 가깝게는 V2 로켓 기술을 확보하기 위해 독일의 전범 과학자들에게 면죄부를 준 미국의 '페이퍼 클립 작전', 그리고 생체 실험의 주역이었던 731부대장 이시이 시로 박사와 미국 생화학전 프로그램 사이의 더러운 협상 등을 통해 매우 분명하게 형상화된다. 그것은 수많은 과학자들을 원자폭탄 제조에 동원시킨 거대과학의 대표 사례 맨해튼 프로젝트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과학과 국가의 공생구조이다. 그리고 이 구조는 지금도 잘 작동하고 있다.

김동광 (과학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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