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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구름 걷힌「탑골승방」|주지 자살비극이기고 초파일 연등 환히 밝혔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비극의 승방에 불심원력(불심원력)의 연등이 불을 밝혔다.
속세의 번뇌에 짓눌려 주지와 총무스님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비구니의 도량(도장)보문사(일명 탑골승방·서울 보문동168)-.
부처님 오신날을 맞아 연등을 다는 이곳 스님과 신도들은 그 어느 해보다도 뜻깊은 봉축불사(봉축불사)를 맞았다.
7개월전 두 큰스님이 비극의 생애를 마친 뒤 그 존폐마저 위험스러웠던 때 오직 불심으로 도량을 되살렸기에 감회는 한층 더 물결치는 것이었다.
탑골승방의 비극이 일었던 지난해10월8일. 36년동안 주지를 말아 독단적으로 종단을 운영하던 송걸례 스님과 총무 강순경 스님은 사찰 내 석굴암·사리탑 신축 등 대규모사업을 벌이면서 진빚 15억9천만원을 감당할 길이 없자 음독자살, 전국 유일의 비구니종단 보문사에는 검은 구름이 덮였다.
종단역사 8백67년. 3만여명의 신도를 갖고 불교중흥에 앞장섰던 탑골승방은 순식간에 빚장이들이 몰려 아우성치는 속세로 변했다.
뚜렷한 후계자도 없었고 종단의 재산·부채명세도 쉽게 드러나지 않아 종단은 풍전등화의 위기였다.
송주지의 장례식을 치른 4일 뒤인 10월12일. 절을 지켜온 80여명의 젊은 비구니스님들이 머리를 맞대고 사태수습과 중창(중창)의 결의를 다졌다.
대중회의(스님총회)를 열고 황법준 스님(59)을 주지에, 총무원장엔 천만순 스님(71), 재단법인 보문원 이사장에 천구순 스님(74)을 선출했다.
실무를 맡을 총무·재무·교무 등 3직(삼직)스님은 모두 40대로 선출했다.
전송주지의 1인체제 총단이 3권 분립을 하게 되었고 과감한 세대교체가 이뤄진 것이다.
새 집행부는 지난해 11월20일 1차 채권자회의를 열어 부채가 모두 2백93명에 15억9천만원임을 밝혀냈다.
채권자들은 대부분이 보문사의 신도들이었다. 그들은 새 집행부의 의욕과 참된 불심에 신뢰를 가졌고 전주지 송스님도 개인의 욕심 아닌 오직 중흥불사에 전념하다 생긴 잘못이라는데 동의, 모두가 신심(신심)으로 뭉치기로 의견을 모았다.
우선 이들은 종단재건 때까지 이자동결을 결의했다. 당시 매월 지불해야할 이자만도 4천여만원이었으나 한푼도 받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종단측은 경외(경외)재산인 보문시장상가 18채(싯가 2억5천만원), 시자원아파트(싯가 3억1천만원), 동원정사(싯가 2억5천만원)와 주택논밭 등을 채권단에 위임, 전체부채중 12억6천만원을 갚기로 했다.
나머지 부채는 채권자들의 양해를 받아 시간을 두고 사찰운영 수입으로 갚아나가기로 합의했다.
간부스님은 물론 어린 행자까지 돈이 될만한 물건은 모두 희사했고 신도들의 정성어린 찬조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김은수 행자(11·D국교4년)는 저금통을 털어 1만8천원을 냈고 이도언 행자(11·S국교4년)는 매일 밤을 새워 5천여통의 편지를 써 신도들에게 보내 시주를 원했다.
비간부 스님들은 탈속 때 지녔던 정표였던 실가락지까지 빼내 종단에 내놓았고 행상을 하는 송진아 신도(49·여)는 매일 3천원씩을 내놓았다. 많게는 기십만원에서 적게는 몇백원까지의 재건성금이 모여 1천5백만원이 되었다.
『물론 한달 이자도 안되는 적은 돈이었습니다만 십시일반의 단결력이 채권단을 움직였고 3만신도의 가슴을 울린 것이지요.』
채무정리 실무를 맡았던 법종스님은 모두가 부처님이었고 모두의 마음이 부처님의 뜻이었다고 했다.
부동산경기 침체는 이곳에도 불어 내놓은 땅과 건물이 팔리질 않았다. 절 앞의 일반주택 3채와 의정부의 전답일부가 팔려 1억여원의 원금상환을 했을 뿐이다. 『채무판제율은 7%정도입니다. 어느 채권자 한 분도 먼저 판제 요구를 안했습니다. 그중 제일 급한 분만 우선 받아 가셨지요.』
법종스님은 고마운 분들을 위해, 그 어느 때보다 더 부처님의 대자대비를 기원하는 독경을 이곳 스님들은 올리고 있다고 했다.
채권정리위원회 한호상 회장(41·상업)은 『도량의 재건은 부처님의 뜻이요, 우리가 돈을 받는 것은 속세의 일이니 신도의 도리는 부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며 지금은 오직 종단재건에 일념할 뿐이라고 했다. 보문사의 신도로 5대째를 이어온 김지현씨(67·여·경기도양주군)는 『15억원이 얼마나 큰돈입니까. 채권단 모두가 불심이 약하면 오늘의 결과가 없었을 것』이라며 두 손을 모았다.
어두웠던 그림자룰 말끔히 씻고 세상 밝히는 연화등을 든 신도들은 자신들의 마음이 부처된 듯 비극의 사연이 담긴 사리탑을 돌고 있었다.
『속세의 비극을 겪었기에 탑골승방은 이제부터 자비정토(자비정토)의 승가(승가)가 될 것입니다.』
맑고 우렁찬 법종이 보문골에 울려 퍼졌다. <한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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