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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03>|제77화 사각의 혈투60년(21)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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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한국프로복싱의 선구자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뭐니 해도 서정권이다.
동양인으로서 최초로 프로복싱의 메카라 할수 있는 미국 뉴욕의 매디슨스퀘어가든에서 활약했으며 밴텀급의 세계랭킹6위까지 오른 아시아최초의 세계적 복서였기 때문이다.
서정권은 일본동경에서 데뷔하자 연승가도를 치닫다가 곧 프로복싱의 본격무대인 미국으로 떠나버렸고, 태평양을 건너오는 믿기 어려운 파죽지세의 승전보는 키가 불과 lm58cm인 이 「작은 거인」을 거의 신화적인 존재로 만들어 놓았다.
서정권은 전형적인 인파이터였다. 경량급이므로 물론 빠르기도 했으며 더구나 중량급을 뺨치는 KO펀치 때문에 넘쳐 흐르는 박진감은 어떤 선수도 따를 수 없었다.
허리가 워낙 유연한 서정권은 간단없는 보디웍, 헤드웍으로 상대를 교란시킨 후 더킹모션과 함께 다이너마이트가 폭발하듯 작렬하는 좌우 훅의 콤비블로가 일품이었다.
이 연발의 속사포에 웬만한 상대는 거의 침몰하고 말았다.
서정권은 또 인파이터인데도 거의 홀딩이나 클린치가 없었다. 경기스타일이 너무나 깨끗했다.
서정권의 복싱을 보는 관객들은 그저 후련하고 야무지고 숨돌릴 틈이 없는 박력의 분출에 완전히 매혹 당하며 넋을 잃을 정도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만큼 그의 테크닉, 그의 스타일은 신묘하고 정교하며, 그리고 암팡졌다.
김정연에 이어 이용식과 함께 30년대 초에 활약한 아득한 옛 복싱의 개척기 선수였으나 서정권은 미국을 무대로 하여 국내복싱사상 가장 화려한 경력을 쌓은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비록 세계챔피언은 아니었지만-.
서정권은 1912년 11월23일 순천에서 태어났다. 서병규씨의 4남3녀중 세째였다.
그런데 부친인 서병규씨는 대지주였다. 순천의 서대감이라 하면 최소한 호남지방에선 만석꾼으로 통하는 유명갑부였다. 유년기 외엔 줄곧 서울에 올라와 살았던 서정권은 부자집 도련님으로선 좁 별났다. 유약하기는커녕 다람쥐같이 재빠르고 성격도 사근사근했다.
말하자면 기방이나 즐겨 출입하는 비생산적인 부자집 셋째아들이 아니라 평범한 동네친구들과 어울려 시장으로, 극장으로, 운동장으로 구경이나 다니는 그런 서민적인 스타일이었다.
아마 서정권은 부자집 도련님이 아니었더라도 혼자서 두 주먹만으로 역시 입신했을 것이다.
항상 미소짓는 표정과는 달리 그 속에 강인하고 물러서기를 싫어하는 근성을 지녔으며 타고나기를 왜소한 체구인데도 감기한번 앓는 일이 없을 정도로 건강했다.
그리고 도전적이고 투쟁적이었다.
꼬마때부터 체격이 작다고 누구든지 깔보는 기미가 보이면 용납하지 않았다.
중학생이고, 어른이고 사냥개같이 악착같이 달려들어 주먹의 대결을 벌였다.
이리한 성격의 서정권은 학업엔 별 관심이 없었고 27년 완서동에 설립된 조선권투구락부에서 같은 갑부 집안인 성의경과 그의 형제들이 폼을 재는 것만이 한없이 부럽고 흥미로왔다.
28년부터 시작된 전조선 아마권투 선수권대회를 비롯, 권투시합을 특히 즐겨 구경했으며 친구들과 골목에서 폼을 잡아보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16살 때 중동중에 입학했다. 그리고 곧 일본으로 갔다.
서정권이 일본으로 간 것은 당시 부자집 자제들은 으레 동경유학을 하던 풍조에 따른 것이겠지만 이미 그의 형인 서정욱이 명치대를 다니고 있었던 터에 또 다른 연유가 있었다. 결국은 복싱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형 서정욱과 나란히 명치대를 다니던 절친한 친구가 바로 황을수였다. 황을수는 한국아마추어 복서의 태두라 함은 이미 소개했다.
황을수는 서정욱과 휘문고보 동기동창인 막연한 사이로 나중에 처남 매부의 영원한 인연을 맺었다. 즉 서정권의 누이가 황을수의 아내가 된 것이다.
서정욱도 명치대의 유도선수로 활약, 운동에 대한 이해가 깊어 아무래도 운동 외엔 아무런 흥미도, 소질도, 재주도 없는 동생(서정권)에게 가장 유망한 길을 터주고 싶었다. 그것이 복싱에의 길이었다.
여동생을 줄만큼 절친한 친구 황을수가 곁에 있었던 영향이 물론 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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