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완의 광고로 보는 세상] 보드카와 혁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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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소주가 있다면 러시아에는 보드카가 있습니다. 물처럼 투명하고 본디 무색.무취. 무미한 보드카는 밀이나 보리.호밀 등을 원료로 러시아의 수도원에서 제조하기 시작했고, 곧 황실의 고정 메뉴로 자리잡을 만큼 러시아를 사로잡았지요.

1917년 볼셰비키 혁명으로 많은 러시아 인들이 국외로 망명했습니다. 그 중에는 러시아 황실에 보드카를 독점적으로 납품하던 양조업자 블라디미르 스미르노프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과 양조 기술을 사서 미국에서 생산한 것이 바로 세계 프리미엄 보드카 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스미르노프(Smirnoff)입니다. 스미르노프 광고 중에는 세계적으로 주목을 끌었던 작품이 많이 있습니다. 그중 10여 년 전 광고 한 편을 감상해 보도록 할까요.

차르 체제의 모순이 폭발하면서 러시아의 민중들은 봉기합니다. 시민군은 붉은 깃발을 휘날리며 눈보라를 뚫고 마침내 정부군 본부를 함락시킵니다. 가늘고 기다란 우아한 술잔에 스미르노프를 따라 코로 향을 음미하고 막 한 모금 마신 정부군 장군은 들이닥친 시민군에 의해 비참하게 끌려나가지요.

시민군 대장은 뿌듯한 심정으로 조금 전까지 장군이 앉았던 자리에 털썩 앉아봅니다. 그리고 장군이 마시던 스미로노프를 가늘고 기다란 우아한 술잔에 따라 역시 코로 향을 맡아 봅니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대장이 막 한 모금 마시는 순간 우당탕 문이 열리며 또 다른 시민군 일대가 들이닥칩니다. 나중에 등장한 시민군 대장이 외칩니다.

"저놈을 끌어내!"

겨우 한 모금밖에 못 마신 먼저 온 시민군 대장이 황급히 말합니다.

"어, 나도 시민군인데…."

그러자 나중에 온 대장이 이렇게 말하지요. "뭐야? 스미르노프를 마시는 놈이 인민이라고? 끌어내!"

억울한 먼젓번 대장이 끌려나가고 주위가 조용해지자 혼자 남은 대장이 다시 그 자리에 앉습니다. 그리고 스미르노프가 담긴 가늘고 긴 우아한 잔을 들어 향을 코로 음미합니다. 막 입술로 잔을 가져가는 순간 또다시 우당탕 문이 열리고 세 번째 시민군이 들이닥칩니다.

제품이 지닌 품격 높은 맛을 코믹하게 보여 주고 있다는 매력 외에도 이 광고는 혁명의 이미지에 대해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줍니다.

하늘의 뜻이니 왕조의 성을 갈아야 하겠다는 동양 역성혁명(易姓革命)의 역사도, 새로운 사회 질서의 기반을 만들기 위해 기존의 질서를 뒤엎어야겠다는 서구 시민혁명의 역사도, 결국은 보드카 술잔 빼앗기의 역사가 아니었을까요.

"혁명도 좋구나. 이 빌어먹을 놈들을 혁명해 줄 테다"라고 외치며 루쉰(魯迅)의 아Q가 소설 속에서 튀어나올 것만 같습니다.

동국대학교 겸임교수(광고학) summerdog@lycos.co.kr

*** 필자 김동완은 카피라이터로 출발, 광고기획사 금강기획·휘닉스컴 제작국장, 광고대행사 선연 이사, 금강기획 제작본부장(상무)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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