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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국정의 본산 「세종로1번지」34년…명멸했던 주역들은 증언한다|농지개혁(2)|<제자·철농 이기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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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농지개혁바람은 농촌질서를 헝클어 놓고 있었다. 정부 수립 후에도 좌익은 대지주들의 농지몰수를 계속 선동했다. 지주들은 개혁으로 입게 될 손실을 최소한으로 줄이려했다. 지주와 소작인의 다툼이 늘어갔다. 정치적으로도 미묘한 대립을 보였다. 개혁은 서둘러야했다. 조봉암 농림은 농정의 기본을 농지개혁과 농업협동조합 구성에 두고 개혁 진용을 짰다.
농림차관에는 동경제대 농업경제학과를 나와 해주농업시험장장을 지낸 강정탁(6·25때 납북)을 앉혔다. (초대 차관 남봉순·48년8월∼48년9월) 그는 당시 농업문제의 1인자로 꼽혔다. 농지개혁만을 전담할 농지국장에는 조선언론협회 상임이사인 강진국을 임명했다. 농지국 안에는 농지매수를 담당할 지점과, 분배업무를 맡을 사정과, 시행 후의 분쟁을 맡을 조정과를 두고 과장에는 윤택중·안창수·배기철을 각각 임명했다. 3개 과에는 20∼30대의 젊은 직원 20여명이 배속됐다. 이것이 48년9월 중순, 정부수립 후 한달만이었다.

<보수우파, 신임 안해>
그런데 이 개혁팀에 뒷말이 따랐다. 모두가 새 정부의 주류와는 다른 중도 우파거나 진보적인 색깔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조 장관은 일제 때 조선공산당에 가담해 ML당수를 지냈고 일본경찰에 체포돼 감옥에서 8·15를 맞았다. 그는 곧바로 전향해 우파에 섰지만 보수 우파는 그를 신임하지 않았다.
강 차관이나 강 국장 두사람 모두가 남한의 단독정부(단정)를 반대한 김규식편의 사람이어서 역시 보수우파와는 길이 달랐다.
강 차관은 울산 출신으로 집안이 가난했으나 동경제대를 관비생으로 졸업한 수재였다. 해방 후에는 입법의원 산업노농위원장이었던 박건웅을 알게돼 남북협상파인 민족자주연맹에 참여해 단정반대운동을 했다.
개혁의 핵심 이월 강 농지국장도 민족자주연맹 중앙집행위원 출신이다. 강씨는 경남 동래 출신으로 변호사를 지망, 일본대 법과를 나왔으나 유학기간 일본의 농촌갱생운동에 영향받아 졸업 후엔 농촌운동에 투신했다. 그는 농촌문제에 관한 논문을 신문·잡지에 발표한 인연으로 조선언론협회 상임이사가 됐었다.
강씨는 언론협회시절 적산불하반대운동을 벌이다 입법의원 산업노농위원장 박건웅을 알게되고 그의 권유로 민족자주연맹에 가담, 역시 단정을 반대한 문화인 108인 선언에 서명했으며 조봉암도 소개받았다.
3명의 과장들은 차관과 국장, 그리고 조 장관비서 이영근이 한사람씩 추천해 앉혔고 처음엔 주목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6·25때 이들 3과장이 모두 이북으로 넘어가 농지개혁팀에 대한 보수파의 색안경을 뒷받침한다.
강진국씨의 회고.
『48년8월, 봉선사에서 조 장관 주재 아래 농사심의위원회가 열렸읍니다.
농업관계 학자·전문가 등 10여명이 자유토론을 했는데 당시 나는 농지개혁과 농협조직을 강력히 주장했지요. 그런지 며칠 후 조 장관이 이영근 비서를 보내 농지국장을 맡아달라고 해요.
나는 단정반대 입장이었기 때문에 거절했는데 박건웅씨가 열심히 권해 취임을 승낙한 것입니다.
초기 농지개혁팀의 컬러에 관해 일부에서 조 장관에 대해 말이 있었던 것은 잘 압니다. 그러나 장관의 사상이 조금이라도 달랐다고는 단연코 생각하지 않습니다.
강 차관은 6·25때 빨갱이에게 잡혀갔고 나 자신은 정치보위부에 끌려가 갖은 곤욕 끝에 구사일생했습니다. 우리의 농지개혁이 지주와 농민을 동시에 보호하려한 점은 초안법 조문에 잘 나타나 있읍니다.』
농지개혁의 추진제인 농림부 농지국은 처음 정부기구발표 때만 해도 토지개혁국으로 돼있었다. 군정 당시 「랜드·리폼」이란 영문을 우리말로 번역하면서 토지개혁으로 하고 이것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이 명칭을 바꾼 것은 강 국장.
강 국장은 조 장관에게 『헌법에도 농지를 농민에게 준다고 했지 않습니까. 그러니 농지국으로 해야 옳습니다.
만일 토지개혁국으로 한다면 한민당과 지주 등쌀에 간판이 사흘도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고 했다.
법안 명칭도 농지개혁법으로 확정했다. 「개혁법」이라는 말이 지주들에게 거슬리는 표현이 되지 않겠느냐 해서 그대로 농지법이라는 표현을 쓰자는 의견도 있었다.

<"개혁"표현도 논란>
그러나 최대의 사회개혁을 단행하는데 강력한 인상도 주어야 하고 이미 북한에서 토지개혁을 단행한 뒤이니 소작인의 민심을 수습하는 뜻에서도 「개혁」이라는 말을 써야한다는 결론이었다.
농지개혁에는 3가지의 방법이 있었다. 첫째는 유상매상에 유상분배, 두번째는 유상매상에 무상분배, 세째는 무상몰수에 무상분배다. 첫째는 우익, 둘째는 산업노농위원회측, 셋째는 좌익이 주장한 것이었다.
정부의 개혁방향은 처음부터 유상매상 유상분배였다. 그러나 약간의 주장이 엇갈린다. 초대 문교장관 안호상씨의 회고. 『국무회의에서 조 농림은 농지는 무상 분배해야겠다고 제안했어요. 그러자 다른 장관들이 모두 반대했어요. <농지개혁의 본뜻은 소작인에게 농토를 주어 땅없는 농민을 없게 하고 소수 대지주의 농지독점을 막자는 것이지 지주계급을 몰락시키거나 무산농민계층에 특혜를 주자는 것은 아니다. 공산당식 혁명이 아닌 다음에야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반론이었어요.』
이에 대해 강 국장은 『그럴리가 없다』고 했다. 『조 장관이 무상분배를 주장했을리 없어요. 그는 개혁법안에 대해 거의 간섭하지 않았어요. 또 제헌헌법에도 국민의 재산권 제한에는 반드시 보상을 하도록 명시돼 있어 무상몰수란 헌법위반이 되니까 논란의 여지가 없었어요』라는 주장이다.
개혁의 방향은 섰으나 법안각성이 문제였다. 자료도 통계도 없는 백지상태였다. 그래서 실무팀은 자료수집에 나서야 했다.
강 농지국장의 증언.
『농민들의 희망사항, 소작실태 등을 살펴보느라 40여 차례 다녔지요. 고양·양주·화성·시흥 등지를 매일 저녁 찾아갔읍니다. 농지국장이라 해서는 말을 안할 것 같아 신문기자행세를 했죠. 주로 사랑방 회의처럼 마을 사람들을 모아 <정부가 농지개혁을 한다는데 당신들 의견은 어떠냐. 신문에 내줄테니 말하라>고 했읍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농촌에 빨갱이들이 많았읍니다.

<관심은 상환기간>
그래서 말을 잘 안해요. 지주를 옹호하다가는 빨갱이나 같은 소작인에게 혼나고 좀 과격한 말을 하면 빨갱이로 몰리거나 지주로부터 땅을 떼일 염려가 있었으니까 말조심을 하는거죠.
농민들의 관심의 초점은 상환기간이었는데 다수 의견은 5년, 더러는 3년을 말하는 사람도 있었읍니다. 지주들은 대부분 체념상태로 보강이나 잘 해줬으면 하는 정도였죠.』
전경식씨(당시 농지국 직원)의 증언. 『당시 농촌에서는 농지를 둘러싼 분쟁이 많았습니다. 방매 또는 강매 때문이었지요. 즉 지주들은 소작인에게 지금 짓고 있는 땅을 사라, 만일 사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팔겠다는 것이고 소작인들은 연고권이 있으니 내놓을 수 없다는 것이었어요.』
70년에 농림부가 발간한 농지개혁사에 따르면 47년 1년 동안 서울지방심리원(현 서울민사지방법원)에 민사사건으로 계류된 사건은 모두 6백2건이었는데 이 가운데 소작권문제가 91%인 5백49건에 달했다. 이것은 46년의 1백36건에 비해 무려 4배 이상 늘어난 것이었다.
법안작성이 자료 수집으로 시간을 끌자 이 대통령은 11월 중순 불호령을 내렸다. 신문지상에 지주·소작인간의 분쟁이 간간이 보도됐기 때문이다. 대통령에게 야단을 맞고 나온 조 장관은 날짜를 정해 완성하라고 했다.
농지개혁법 시안은 이렇게 쫓기는 상황에서 48년11월19일과 20일 이틀동안 강 국장 집에서 최종 손질이 이뤄졌다. 강 국장이 3명의 담당과장을 데리고 꼬박 이틀밤을 새워 만들었다. 부칙까지 전문 7장25조로 되었다.
시안의 특징은 호당 농지상한선을 2정보(6천평)로 하고 보상은 연 평균 생산량의 1백50%, 3년 거치 10년 분할지급이고 농민들의 상환은 1백20%를 연20%씩 6년간 현곡으로 내도록 했다. 지주에 대한 보상은 보상증권을 발행하되 토지자본을 산업자본화한다는 방침 아래 「개간 간척사업·과수원·묘포조림·임산·수산·공업생산·광산개발 등 국가경제발전에 유리한 사업운영에 적극 참여케 하기 위해」 기업자금의 담보물로 이용할 수 있게 했다.

<"지주도 살아야지">
시안을 만들어 조 장관에게 들고 갔을 때 조 장관은 내용을 읽어보지도 않은 채 대뜸 『소작인이 잘된다 하지만 지주도 살아야 할 것 아니요』라고 했다고 강 국장은 말한다.
농지소유 상한선을 농가 호당 2정보로 잡은 것은 작은 땅을 많은 사람에게 나누어주자니 부득이한 조치였다. 당시 소작농가는 약1백만호, 분배대상토지는 60만 정보 밖에 안돼 실제 한 가구에 돌아갈 수 있는 땅은 1천8백평(6단보)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2정보로 한 것은 농지가 너무 영세화하는 것을 막자는 것과 황소 한 마리가 하루 2천평을 간다고 보고 사흘갈이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당시의 농지소유사정은 2정보 초과가 총2백만 농가의 10%인 20만이며 2∼3정보가 15만4천, 3∼5정보가 4만1천, 5∼10정보는 5천4백, 10정보 이상은 2백42가구였다.
지주보상 1백50%, 소작인 상환 l백20%의 차액 30%는 상환곡의 이자로 메운다는 것이었다.
정부시안의 농지매상가 1백50%는 당시 논값을 평당 36원으로 계산한 것이다. 정부 수매가격이 벼 1가마에 1천2백원이었으므로 2백평에 4가마가 난다고 보면 1년 소출이 4천8백원이고, 논값을 이것의 1백50%로 하면 평당 36원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좋은 논은 평당 4백∼5백원 하는 곳도 있었으므로 지주들은 불만스러운 것이었다.
농림부 시안은 11월22일 저축은행(현재의 제일은행) 4층에서 긴급 소집된 시·군 농업경제과장 회의에서 공개됐다. 국회 농림분과위원회에도 비공식적으로 보냈다. 그리고 이듬해 l월4일부터 20일까지 각 도청소재지에서 공청회에 붙여졌다.
농림부가 시안을 정식으로 국회에 제출하기 전에 공개해 버린 것은 하나의 전략이었다. 정부가 농지개혁을 서두르고 있다는 것을 알림으로써 좌익의 공세를 막고 지주들의 농지방매를 중단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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