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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 박씨 집성촌 경기도 이천군 율면 고당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경기도 이천군 율면 고당리-.
고령 박씨 부창정공파의 후예1백70여가구가 집단마을을 이루고 산다.
속칭이 고잣골(고백동). 「고잣골 박씨」라면 이천군내에서는 알아주는 성씨로 율면의 8대성 중에는 으뜸으로 친다.
박씨들이 이 마을에 정착한 것은 4백여년 전 조선조중엽. 조선조 대종 때 병조판서·위조판서를 지낸 무숙공 박만의 6세손 자항이 터잡아 현재 18세까지 대가 이어지고 있다.
해방전후까지만 해도 인근 월포리 등까지 2개리에 3백여호가 살았으나 6·25후 도시이주로 날로 주는 추세.
뒤로 임오산의 지맥을 지고 남한강의 지류인, 청미천 연변에 넓은 들판이 열려 유족한 살림을 꾸려왔다.
자항의 5대손 만중은 근검으로 재산을 이루어 청미천연변 인여정보의 논을 거의 소유하는 거부로 전한다. 그의 이름을 따 일대의 들이 지금도 「만중들」로 전하는데 후손들은 조상의 이름을 부를 수 없어 「만종들」로 바꿔 부른다고. 그는 고령 박씨 문중에서는 처음으로 숙종34년(1708년) 부창정공파의 족보를 간행하기도 했다. 『큰 벼슬은 못했으나 대대로 벼슬이 끊이지는 않았고 남한테 허리는 안 굽히고 살았지….』
마을 종친회장 박경구씨(71)의 말. 부지런히 농사지어 제 앞가림하고 남한테 못할 일은 안하고 살았다는 가풍을 내세운다. 조선조말 안동 김씨의 세도가 드셀 때 임오산 산세가 좋다하여 김씨들이 묘 자리를 잡기 위해 몰려왔다. 세도에 빌붙어 기회를 잡아보려는 무리들이 줄이었지만 유독 박씨들만은 냉담한 자세로 휩쓸리지 않았단다. 김씨네들도 박씨네의 영역까지는 침범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양반골」답게 보수적 기질이 강해 일제 때는 마을에 세워진 신식학교에 자녀들을 보내지 않아 학교가 이웃마을로 옮겨가기도 했으나 교육열은 높아 웬만하면 높은 공부를 시키고 있다.
때문에 공부를 마친 후손들은 외지에 나가 자리잡고 마을은 점점 노인들만 남게되는 형세다.
『이제 한10년 지내면 고잣골 박씨 마을도 없어지고 말 것 같아. 세월 탓인데 별수 있겠어….』
박경구 노인은 체념하는 표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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