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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량 전 특파원이 파헤친 서독의 두 얼굴(12)|한국인과 로렐라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67년3월 「하인리히·뤼프케」당시 서독대통령이 한국정부의 초청으로 서울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서독대통령일행이 김포공항을 떠나 서울도심에 이르는 도로변에 늘어선 남녀 학생들은 우리가 독일의 대표적 민요로 생각하는 『로렐라이의 노래』를 합창, 외빈을 맞았으며 「뤼프케」대통령은 만면에 미소를 머금은 채 두 손을 흔들며 환영인파에 답례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서독 빌트지는 「뤼프케」대통령의 서울도착기사를 다음과 같이 회화적으로 묘사했다. 『「왜 이토록 슬픈가를 나는 모르네」라는 「로렐라이의 노래」를 왜 「뤼프케」대통령에게 들려주었는지 나는 모르네.』
「로렐라이의 노래」는 유대계시인 「하인리히·하이네」의 시에다 주로 구성진 가락만 읊은 「프리드리히·실러」가 작곡한 것이기 때문에 독일에선 널리 불려지지 않고 이상하게도 한국이나 일본에서 본고장보다 더 애창하는 노래다.
이 「로렐라이의 노래」의 소극은 한국과 독일감각의 차이를 나타낸 한 작은 일화에 지나지 앓는다.
양국의 감각 차이는 여기저기서 나타난다. 서독을 찾는 정치인들의 대부분이 특별한 「거리」도 없이 무턱대고 얼굴 한번 보자는 식으로 서독정치인들과의 면담을 현지 한국대사관에 요청한다.
만나서 하는 일이라고 인삼상자 한 두개를 건네주고 시간 있을 때 한국에 한번 와달라고 말하는 것이 고작이다. 그런 다음 여러 장의 사진을 찍는다. 선거구민을 겨냥한 그 홍보전략」의 하나인 셈이다.
이럴 경우 방문을 받은 서독사람은 당황할 수밖에 없다.
서독방문을 국내선전에 이용한 예는 얼마든지 많다. 78년 본을 방문한 한 의원은 엽서와 5페니히 짜리 우표를 각각 2만장이나 쇼핑해 왔다. 선거구민에게 보내기 위해서였다.
인구16만명의 작은 도시인 수도 본에서 그렇게 많은 양의 엽서를 한꺼번에 사기란 쉽지가 앉아 결국 멀리 퀼른시까지 원정쇼핑을 해야했다는 이야기다.
이 의원은 귀국 후 통상요금의 20분의1인 5페니히(15원)짜리 우표를 엽서에 붙여 선거운동원을 시켜 직접 선거구민들의 가정으로 보내려는 연극이었다.
본 대학의 몇몇 교수들도 할 일 없이 찾아오는 한국여행자들 때문에 불편을 느낄 때가 있다고 했다.
방문을 하겠다고 해 만나면 특별한 화제도 없고 오히려 시간만 낭비한다는 푸념이다.
차범근 선수의 계약내용이 좋다는 말만 믿고서 서독행비행기를 탔다가 고생하고 있는 몇몇 축구선수들, 그리고 다투어 인삼수출에 열을 올리다가 끝내는 인삼 값만 떨어뜨려 놓은 상인들도 마찬가지다.
언젠가 라인란트팔츠주의 「베른하르트·포겔」주수상(기민당)의 방한초청을 앞두고 서울과 본 사이에 견해가 엇갈린 적이 있다.
초청자인 한국관계자는 아무리 연방국가라 해도 서시의 주가 우리 나라의 도에 해당되므로 당연히 도지사를 파트너로 해야한다는 견해인데 반해 서독 측에선 예우를 격상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지난 80년 야당수장후보로 출마한 「프란츠·요셉·슈트라우스」와 84년 총선을 향해 수상후보로 물망에 오른 정치인 모두가 현직의 주수상이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빚어진 견해차이에서 연유된 것이다.
한 국회의원이 서베를린의 올림픽 탑에 숨어 들어가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씨의 일본국명을 망가뜨렸을 때도 서독에서는 문명국 인사로서는 못할 일을 한 것처럼 받아들인 적도 있다.
디차이트의 주필 「테오·조머」박사는 자기의 자(척)로 남을 재면 오차가 생긴다면서 이 오차를 줄이기 위해서는 서로 상대방을 배워야한다고 했다.
우리가 서독을 깊이 이해해야 할 시기에 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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