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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초대내각(3)<제자·철농 이기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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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국무회의의 일 처리 순서는 초대 내각의 민주적 자세를 반영하고 있다. 국무회의 최초의 입법은 그해 8월28일 국회에 제안한 사면법안이다(헌법·정부조직법 등은 정부수립 전 제헌국회에서 제정했음). 국무회의는 사면법에 이어 「한글전용에 관한 법률」, 양곡 매입법, 국적법 순으로 기초 입법을 해 나갔다. 사면법이 정부의 제 1호 입법이 된 배경은 이인 법무의 제안 설명에서 잘 나타나 있다.
이 법무는 국회에서 『조국이 광복되고 정부가 섰읍니다만 감옥에는 2만여명의 죄수가 있읍니다. 독립된 이상 이들에게도 혜택이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 법안은 벌써 제정되어 8·15 정부수립의 경축일에 혜택이 주어졌다면 좋았을 것입니다.
그간에 수속이 미비한 점이 있었고 국회도 휴회 중이어서 오늘에 와서야 제안하게 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합니다』라고 했다.
한글전용법은 이 대통령의 지시사항이기도 했다. 그러나 문교부에서 막상 올렸을 때 대부분의 국무위원들이 반대했다. 안호상 초대 문교의 당시 회고. 『내가 한글전용문제를 꺼냈더니 일부 장관들은 <학생들에게 한자를 가르치지 않으면 모두 무식장이가 될 것> 이라고 하면서 반대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한문을 안 가르치면 무식장이가 된다는 말이야말로 무식장이의 말이다. 외국말을 모른다해서 무식장이인가, 미국인이 한국어를 몰랐다해서 무식장이라고 한 사람이 있는가. 당신은 한글을 얼마나 알고 있느냐, 「많다」또는 「좋다」라는 우리말을 바르게 쓸 줄 아느냐> 고 대들었지요. 당시 대부분이 「많다」를 「만타」로 「좋다」를 「조타」로 쓸 정도로 철자법을 몰랐거든요. 지금 생각해도 약간 거친 표현이었지만 그만큼 국무회의는 항상 열기에 가득 찼었어요.』

<"한자 모르면 무식">
대통령령 l호는 8월30일자의 공포식령이다. 이 영은 「대통령이 국회에 보내는 국무에 관한 서한에는 전문을 붙여야 한다.」「헌법개정 제안은 전문을 붙여 공고한다」는 등 대통령의 국정에 관한 문서서식이다. 이 색다른 .영이 1호가 된 경위는 사면법을 국회에 냈을 때 그 서식에 관한 논란이 있었기 때문이다.
공포식령과 같은 날자에 마련된 2호는 정부의 부패행위 방지를 위한 감찰위원회 직제에 관한 규정이다. 이 감찰위원회는 발족되자 곧바로 감찰의 과녁을 장관과 대통령 비서실로 해 파란을 일으키지만 국무회의가 그들의 청렴도를 감독할 기구를 「남조선과도정부 인수에 관한 규정」이라는 최우선의 문제보다 앞세워 처리함으로써 부패방지에 대한 그들의 결의를 보였다고 할까.
초기 국무회의는 각료들의 국정전반에 대한 관심이 높아 토론이 많았다. 이시형 부통령도 처음 한동안은 회의에 나오는 등 국정에 적극적이었지만 역시 시간을 건너뛸 수 없었던 옛사람(조선조 평안관찰사도 지냈음)이었다.
박용만 비서의 기억으론 『이 부통령이 경무대로 왔다고 알리면 대통령은 <뭣 하러 오셨어. 그분과 만나 얘기해도 별말이 없는 거야> 라고 하면서도 아끼던 위스키대접도 하며 얘기를 나누었다. 국정에 관한 충고도 없지는 않았겠지만 때로 신변잡담 등으로 2시간 이상을 끌어 일에 묻혀 시간을 쪼개 쓰는 대통령의 스케줄을 엉망으로 만들기도 했다』고 했다.
당시의 내무장관 윤치영씨는 『이 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각 부처의 일에 이런저런 참견을 많이 했다. 하지만 미국의 국무회의에는 부통령이 참석지 않는데 우리 부통령은 꼬박꼬박 나와 때로 시대에 맞지 않는 주장을 펴 참견한다고 국무위원들이 불평했고 이 대통령도 그런 생각을 했으나 누구도 그런 내색을 드러내놓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역시 부통령 스스로가 따돌림을 받는다는 느낌을 가졌던지 얼마 뒤엔 참석지 않게 되고 어느새 국무회의에 부통령 자리는 없어 졌다』고 했다. 사실 부통령제를 채택하면서 총리를 둔 것은 어딘가 잘못된 헌법 체제였다. 그나마 부통령도 총리도 그들이 해야할 적절한 역할을 찾아내지 못했다. 이 대통령은 차차 국무회의 운영에서 엄격해져 갔다. 비서였던 안희경씨의 증언.

<만나도 할 말 없는데>
『국무회의 때 이 대통령은 총무처가 미리 준비한 부의 사항 프린트는 보지도 않은 채 <보고할 것 있나> 라고 장관들을 얘기하게 했다.
이럴 때 장관들이 소관 부처의 업적만을 늘어놓으면 대통령은 <자네 앉게. 여기는 자네가 잘 했다고 이야기하는 곳이 아니야. 이런 일을 하려고 했는데 안되었다든지, 부처간의 협조나 대통령의 협력을 부탁하는 곳이야> 라고 제지하곤 했다.
국무회의에서 장관들의 보고가 끝나면 배석한 경무대 비서에게 <자네들도 보고할 것 있지> 라고 지시해 신문에 보도된 각 부처의 비판기사와 사회여론 등을 보고하게 했다.
이 보고에서 지적된 사항에 해당되는 부처의 장관에게 대통령은 <×장관 얘기를 해봐> 라고 시켜 답변을 하면 회의가 끝난 뒤 비서들에게 <경찰을 시켜 그대로 되었는지 조사해 올리게> 라고 지시하곤 했다. 어느 날 국무회의에서는 쌀값이 오르고 절량민이 많다는 신문보도를 보고하자 이 대통령은 <여기 장관 중에 굶어본 사람 있어. 뇌물을 받아 광에다 쌀을 쌓아놓은 사람도 있겠지> 라면서 <나는 굶어 봤어. 굶어본 사람이라야 국민들의 고통을 알아…. 뇌물 받은 놈 있으면 포살해야 해> 라고 말해 국무위원들을 하얗게 질리게 만들기도 했다.』
국무회의에서 대통령은 국무위원들간의 자유스런 토론을 지켜보다가도 그의 뜻에 맞지 않으면 토론을 중지시키고 <그런 이론들은 맞지 않다> 고 결론 짓기를 잘했다. 안희경 비서는 『국무회의에서 대통령과 장관의 뜻이 다를 때는 대개 대통령의 뜻대로 결정되었고 다만 대통령의 사실판단의 잘못이나 법률과의 저촉은 관계 장관이 뒤에 대통령 실에 가서 설명해 바로잡기도 했다』고 기억하고 있다. 그렇기는 해도 초기의 장관들은 자기주장도 강하게 내세웠다. 황규면 비서는 『흔히들 장관들이 대통령 앞에서 쩔쩔매기만 한 것 같이 표현한 것은 잘못』이라고 했다.
이 총리·조병옥 목사·이인 법무 등은 고집도 꽤 부렸고 지부장관으로 불린 신성모 국방도 「초기엔 대통령 계신가」고 묻고 활발히 드나드는 등 대통령과 장관의 관계는 최소한 초기엔 스승과 제자 같았다고 했다. 그 무렵의 국무회의 스케치-. 유진오 법제처장의 회고-. 『한번은 국무회의에서 사회부장관인 전진한씨가 복권발행을 의제로 내놓았다. 재정형편이 어려워 사회복지기금을 위한 복권발행이었던 듯하다. 그런데 대부분의 장관들이 찬성을 하고 나 혼자 반대하는 형국이 되어 20∼30분간 논의를 벌였는데 잠자코 앉아 있던 이 박사가 <복권이 뭐지?> 하고 물었다. 그래 영어로 고 대답을 했더니 한마디로 <그건 안돼> 라고 하는 바람에 길었던 논쟁은 끝나고 말았다.

<문교장관은 싸움꾼>
안호상 문교장관의 회고. 『일제시대 문교예산은 학무국 소관이 아니라 내무국 소관이었다. 해방이후에도 그대로 학교에 투입되는 비용은 물론, 교사임용권까지 내무장관이 쥐고 있었다. 이것은 일본인들이 식민지 통치를 하면서 모든 행정이 경찰권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해놓은 것이다. 미군정에서도 이를 그대로 답습해, 행정경험이 없는 초기 장관들은 내가 문교예산과 인사권의 분리를 들고나서자 찬성도 반대도 아닌 묘한 반응들이었다.
여기에 관한 법률개정안이 성안돼 국회에 제출했더니 국회통과 전에 내무부에서 전국군수회의를 소집했다.
내무부장관이 직접 공문을 보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여하튼 회의를 마친 군수대표 3명이 나를 찾아왔다. <왜 왔소><장관님, 교육예산은 내무부에서 다뤄야합니다><당신들은 군수지. 군수가 문교장관보다 교육행정을 더 잘 아나. 문교예산은 문교부가 써야지 어떻게 내무부에서 쓴단 말인가. 여기가 어디 일본식민지야. 문교부 일에는 상관 말고 가서 지방행정이나 잘해> 라고 호통을 쳐 돌려보냈다.
그때 국회의원들은 아직 행정에 대해선 잘 알지 못했으나 문교장관 말은 잘 들어주는 편이었다.
49년 국회에서 예산에 관한 개정안이 통과되어 예산은 옮겨왔지만 인사권이 문제였다.
이를 뜯어 고치려하자 내무부 쪽의 반발이 너무 심해 교원임명권을 문교부로 가져오는 대신 각도의 학무국장만은 내무부와 문교부가 협의하여 임명하기로 절충했다.
행정제도가 미처 정비되지 않아 각 부처의 이해가 얽히는 경우가 많은 때라 나는 12부4처 장관 거의 모두와 싸웠다. 그 일례로 미군정 때 대학들이 생겨나면서 농대는 농림부에서, 상대는 상공부에서, 해양대학(당시 교통대학)은 교통부에서 돈을 댔다. 나머지 문교부 소속은 서울대와 부산대 뿐 이었다. 이들을 모두 문교부에서 일괄 운용하려 했더니 타부 장관들은 마치 자기들의 권한 침해인양 여겨 관계부처 장관들과 돌아가며 싸우다시피 했다.
군정 때 내무부 소속이던 문화국을 문교부로 옮겨오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이해관계가 없는 법제처만 빼놓고 모든 부처와 한번 이상 싸워 이 박사가 <문교부장관은 싸움꾼> 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유진오 법제처장의 회고. 『새 정부수립 뒤에도 귀속재산에 관한 권한은 미군 측이 갖고 있었다.
이 귀속재산을 모리배들이 미군들에게 뇌물을 주어가며 도둑질하고 처분한다는 소문이 들리자 이 박사는 내게 <귀속재산을 미군에서 처리하는 것은 무효> 라는 법안을 제정하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당시 진행 중이던 「재정 및 재산에 관한 한미간 최초 협정」에는 「대한민국정부는 미 군정청이 행한 모든 처분과 행위가 유효한 것임을 승인한다」는 방목이 있어 전혀 상반되는 것이었다.

<저 양반 성미 알면서>
나는 이 박사에게 <대통령께서 귀속 재산을 미군이 처리하면 무효라는 법률을 제정하라 하는데 협정 초안에 이런 항목이 있으니 원하는 제정하려면 이 협정을 거부해야 한다> 고 이야기하자, 대통령도 아무 말을 않아 협정은 그대로 서명되었다.
그런데 협정이 체결되고 2∼3주 뒤 다시 귀속재산을 미군과 짜고 해먹는 사례가 많다는 소문이 나자 국무회의에서 이 박사가 얼굴에 경련을 일으키며 <법제처장은 뭘 하길래 법률을 안 만드느냐> 고 호통을 쳤다.
그래 내가 전에 직접 이야기한 것도 있고 해서 벌떡 일어서려 하자 양쪽에 앉았던 장택상 외무와 김동성 공보처장이 <저 양반 성미를 알면서 왜 그러느냐> 고 잡아당겨 주머니가 뜯어지기도 했다.
「재정 및 재산에 관한 최초협정」에는 미국 측에서는 「헬믹」준장이 수석대표로, 우리측은 이범석 총리와 윤치영 내무·장택상 외무, 그리고 나와 이순탁 기획처장이 고문으로 참석했다.
이 회의장에 어느 날 군정장관 「딘」소장이 흥분된 얼굴로 들어와 「헬믹」준장을 밀어 제치고 그 자리에 앉아 대뜸 <당신네들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한 실력을 갖고 있는 한국선수들이 왜 20 등 밖으로 처졌는지 아느냐> 는 것이었다.
이 총리가 <운동경기란 이길 때도 있고 질 있는 것이 아니냐> 고 대답하자 「딘」소장은 <한국선수들이 단결하여 외국선수와 싸우려하지 않고 저희끼리 경쟁해 3명이 서로 우승하지 못하도록 견제하다 참패했다> 며 <군정시대의 부장들과 새 행정부의 장관들이 서로 싸우는 것이 꼭 이번 마라톤과 같다. 점진적으로 이양을 한다는데 왜 조용히 기다리지 못하고 초조하게 구느냐> 고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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