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사다트최후의회고록 제2부 『내가 알고있는것들』<2>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이집트는 이스라엘과 캠프 데이비드협정을 체결하려 한다는 이유로 아랍세계로부터 호된 비난을 샀었다.
그러나 그들이 캠프 데이비드의 내용이 알려지기도 전에 무작정 우리를 몰아세운것은 슬픈 일이었다.
이 협정이 우리 아랍세계가 목표하는 바를 실현시켜줄 수 있는데도 그들은 내용을 전혀 알지 못하면서 그저 비난하기에만 급급했다. 그들은 우리가 이스라엘이라는 적과 협상을한다는 단순한 이유로 그렇게 했다.
이런 비난은 78년 평화협상의 진행과정에서부터 퍼부어졌다. 그무렵 요르단의 「후세인」왕은 런던에 체류하면서 나의 한 보좌관과 같은 호텔에 묵게되었다.

<두얼굴의 사나이들>
「후세인」왕은 비교적 젊은 그 보좌관의 방을 찾아가 『「사다트」대통령과 접촉이 됩니까』고 물었다. 「후세인」왕은 이어 캠프데이비드로 전화를 걸어 요르단이 평화협상에 참여할 준비가 되어있음을 알려달라고 그에게 말했다.
나의 젊은 보좌관은 왕의 은밀한 방문에 놀라 내게 곧 전화를 걸어 감격한 목소리로 「후세인」왕의 제의를 설명했다.
나는 그에게 「후세인」왕의 전화번호를 물어 전화를 걸었다. 「후세인」왕은 나에게 협상이 어떻게 진전되어가는가고 물었다. 나는 별다른 진전이 없으며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견해차이는 아직도 매우 넓다고 말했다.
그시점에선 이스라엘과의 협상전망이 불투명한 상태였다.
그는 성공할 희망이 있긴 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기다려봐야할 것 같다면서 협상이 진전되는 대로 다시 알려주겠노라고 약속했다. 나는 이스라엘과의 구체적인 합의에 도달하기 전에 「후세인」왕을 협상에 끌어들이는것은 현명치 못하다고 판단했다.
다음날 미국TV의 보도를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 ABC-TV 앵커맨 「바버러·월터즈」는 내가 런던에 체류중인 「후세인」왕에게 전화를 걸어 평화회담에 참여하도록 요청했다고 「후세인」왕의 말을 인용보도했다.
또 「후세인」왕은 이요청을 거절했으며 유럽과 모로코방문일정을 앞당겨 요르단으로 되돌아가기로 결정했다고 말한것으로 보도됐다.
나는 보좌관들에게 이보도를 공식 부인하라고 지시했다.
「후세인」왕의 행동은 전형적인 국제흥정의 하나였다. 그는 나에게 회담에 참여하겠다고 제안했으며, 사우디아라비아가 평화협상에 반대행동을 취하도록 그에게 압력을 가했다고 말했었다.
모로코의 「하산」왕도 같은 식이었다. 캠프데이비드협상이 끝나고서 나는 곧바로 카이로에 돌아갈 계획이었다. 그러나 「하산」왕은 내가 모로코의 수도 라바트에 들러가도록 초청했다. 그는 요르단의 「후세인」왕도 거기에서 나를 만나려 하고 있다고했다.
캠프데이비드의 평화협상 내용이 발표된후 전아랍세계가 나에게 반대입장을 취하고 있음이 명백했다.
그래서 나는 워싱턴주재 이집트대사 「아시라프·고르발」박사를 불러 「하산」왕을 난처하게 만들고 싶지않으니 내가 라바트에 들르지 않는것이 좋겠다고 모로코대사에게 전하도록했다.
그러나 두차례나 양해를 구했는데도 왕이 곧이듣지 않아 나는 할수없이 귀로에 라바트에 들러 「하산」왕을 만났다.
「하산」왕 역시 「후세인」왕과 같은 식으로 내가 라바트에 들르겠다고 주장했다고 얼마뒤에 발표했다.

<팔레비왕으로 흥정>
그의 이런 행동때문에 그후 나는 전카이로주재 모로코대사 「압델·라티프·엘·에라키」의 면담요청을 거절했다.
이란의 「팔레비」국왕이 모로코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을 때 「하산」 왕은 나에게 대사를 보내 「팔레비」가 이집트에서 여생을 보내도록 초청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그대신 앞으로 바그다드에서 열릴 아랍국가회의에서 이집트의 입장을 옹호해주겠다고 제의했다.
나는 모로코에 있는 「팔레비」에게 전화를 걸어 내주에 카이로로 와달라고 말했다. 「팔레비」는 내 전화를 받고는 어리둥절해했다. 「하산」왕은 「팔레비」에게 바로 다음주중으로 모로코를 떠나라고 명령했다는 것이었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그는 당초에 「팔레비」에게 모로코에서 생활하라고 권고했다. 그러고선 「팔레비」를 이집트로 초청해 달라고 나에게 요청해왔다.
「하산」왕은 나의 초청수락이 늦어지고 있다고 판단했을 때 「팔레비」에게 24시간내에 떠나도록 즉각 명령을 내렸다. 그것은 납득이 가지않는 행동이었다.
이러한 이유들로 해서 나는 지난주(81년6월) 「하산」왕의 대사와 만나기를 거절했다. 그는 우리가 캠프데이비드협정을 포기하고 이스라엘과 관계를 단절한다면 모로코는 우리와의 외교관계를 회복할 것이라는 「하산」왕의 메시지를 가지고 왔었다. 그 대사는 결국 나를 만나지 못한채 라바트로 돌아갔다.
이런 일들은 모두 캠프데이비드협정때문에 일어난 것이며, 그후 전아랍세계는 나에게 등을 돌려버렸다.
그가운데 사우디아라비아는 비교적 온건한 입장을 취했다.
「할리드」국왕은 나의 예루살렘방문 첫날부터 개인적으로, 공개적으로 이를 비난했었지만 나는 국왕의 태도에 별다른 나쁜 감정을 품지는 않았다.
몇몇 사우디아라비아 관리들은 나를 비밀리에 처치하려고 사막의 캠프에 모여 계획을 논의하기도 했으나, 그 소식은 곧 누설됐고,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캠프데이비드협정이 체결된뒤 이집트와 아랍세계 사이에는 약간의 접촉이 있었다. 한번은 리비아의 「가다피」사촌이 내 생일날 우리 집으로 찾아와 비밀을 지켜야 한다면서 「가다피」와의 화해를 제안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들은 공개적으로 합의한 사항도 지키지 않는데 내가 비밀약속을 어떻게 지키겠는가-.]
「가다피」의 밀사는 리비아가 평화조약문제를 다룬 캠프데이비드협정의 첫번째 조항에는 동의하지만, 팔레스타인인의 장래에 관한 두번째 조항에는 반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평화협정포기 압력>
나는 협정의 내용이 실현되기를 기대하는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캠프데이비드협정문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그것이 팔레스타인 문제해결을 강요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될 것이다.
우리가 캠프데이비드에서 합의한것은 이스라엘이 웨스트뱅크(요르단강 서안)와 가자지구 점령지에서 철수하고, 팔레스타인인이 자치하기전에 과도기를 설정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영구점령보다는 더나은 해결방법이 아니란 말인가.
나는 우리가 결코 팔레스타인인을 대변하고 있는것이 아니라고 거듭 설명했다. 나는 「카터」미국대통령과 「베긴」이스라엘수상에게 이집트가 팔레스타인 편에 서서 행동할수는 없지만, 이스라엘의 점령상태는 종식되어야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었다. 나는 대강 그런 내용을「가다피」의 밀사에게 들려주었다. 그러나 「가다피」도 내진의를 부인할것이 틀림없다고 믿고있다.

<무단전재 금지>
중앙일보는 『사다트 최후의 회고록』 제2부의 한국어 독점권을 파리의 뉴욕타임즈 신디케이션 세일즈 코퍼레이션과 계약했읍니다. 따라서 회고록 내용의 무단전재를 일체 금지합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