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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球와 함께한 60年] (23) 서종철 KBO 초대총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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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서종철 총재는 군(軍)시절부터 사심이 없고 원칙을 벗어나지 않는 분이었다. 그는 프로야구 총재로 취임한 뒤에도 확고한 원칙 아래 모든 일을 처리했다.

서총재가 취임 초창기에 강조한 것은 크게 세가지였다. 초기에 변칙적으로 운영을 하면 프로야구 기반 자체가 흔들릴 수 있으므로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원칙을 벗어나서는 안된다는 것, 소비자(팬)들에게 질 좋은 제품을 공급하기 위해서는 수준 높은 플레이를 보여줘야 한다는 것, 구단들이 모기업의 지원에 의존해 살림을 꾸려갈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벗어나 최대한 자립기반을 만들어 보자는 것이었다.

5공화국 초기에는 각 분야에 걸쳐 정부기관의 간섭 및 통제가 심했다. 프로야구도 마찬가지였다. 체육부.청와대.정화위원회.중앙정보부까지 나서서 간섭을 했다.

시즌 경기 수를 늘리는 것도 KBO가 자체적으로 결정하지 못했다. 아마추어팀인 한국화장품에서 활약하던 선동열이 뒤늦게 해태와 계약을 하는 데도 걸림돌이 많았다. 경기장 질서확립과 관련해서는 정화위원회의 입김이 셌다.

내 기억으로 1985년도 초반까지 운동장이 이틀에 한번은 수라장이 되다시피했다. 응원이 과열해 관중이 빈병.돌을 던지기 일쑤였고 그때마다 경기장 질서 문란의 이유를 들어 정화위원회의 질타가 이어졌다.

88올림픽 유치 이후 경기장 질서확립을 책임지게 된 정화위원회는 국무총리실 산하단체였지만 업무는 청와대 사정비서관실의 지시에 의해 이뤄졌다. 한마디로 막강한 권력기관이었다. 체육부도 KBO로 연락을 해 이틀, 사흘에 한번씩은 회의를 하자고 불러들였다.

당시 민감했던 영호남 지역감정 탓에 82년 5월 17일 광주에서의 해태-삼성 경기, 84년 광주에서의 해태-삼성 경기, 86년도 대구와 광주에서의 해태-삼성 경기 등은 관계기관에서 일정조정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런 어려운 상황을 서총재 혼자 다 맡아서 처리했다. 서총재는 그 과정에서 별다른 내색도 하지 않고 "내가 현장에서 진두지휘 하겠다"라는 말만 했다.

나는 이제까지 많은 사람들과 사귀어봤지만 서총재처럼 존경스러운 선배는 몇분 없었다. 그는 절대로 자기가 한 일에 대해 생색을 내지 않았고 외부에 그 공을 알리려 하지도 않았다.

서총재는 미국.일본과의 야구 외교에서도 적극적이었다. 서총재는 야구 역사가 우리보다 1백년 앞선 미국이나 40년 앞선 일본과의 교류를 최대한 활성화시켜 국내 야구의 수준을 높일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프로야구 개막식에 일본의 시모다 커미셔너,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쇼리키 구단주 등 해외 야구계의 영향력있는 인물들을 초청하자고 제의한 사람도 서총재였다. 당시 메이저리그 커미셔너였던 보위 쿤과 피터 오말리 LA다저스 구단주는 바쁜 일정 때문에 참석하지 못했지만 시즌이 한창이던 8월31일에 함께 한국을 방문했다.

서총재는 선수 보호에도 앞장섰다. 당시 최동원.박철순 등 대어급 선수들이 미국 마이너와 계약하는 등 국내 유망주들이 외국으로 빠져나갈 위험이 있었다. KBO가 83년 7월 7일 메이저리그와, 7월 24일 일본프로야구와 각각 선수협정을 맺었던 것도 서총재의 진두지휘 하에 이뤄졌다.

이용일 前 한국 야구위원회 사무총장
정리=이태일 야구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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