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배명복 칼럼

제네바에서 발견한 것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배명복
배명복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그는 왜 하필 제네바를 선택했을까. 전 세계 168개국에서 80개 언어로 번역돼 1억6500만 부가 넘는 판매부수를 기록한 이 시대 최고의 작가 파울로 코엘료 말이다. 남아도는 돈을 주체할 길이 없어 물가 비싸기로 소문난 제네바의 레망호 주변에 고급 별장이라도 구입한 걸까. 올해 발표된 코엘료의 최신작 『불륜』의 무대는 제네바다.

 이른 아침 상공에서 내려다본 제네바는 물안개에 젖어 있었다. 만년설에 덮인 알프스의 영봉들과 푸른 레망호 위로 안개 같은 구름이 피어오르고, 그 사이사이로 고색창연한 건물들이 수줍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자연과 인공의 조화가 이보다 완벽할 수 있을까. 세계 곳곳을 탐사한 끝에 코엘료가 제네바를 신작의 무대로 낙점한 것이라면 그의 심미안에 고개를 숙이지 않을 도리가 없다. 『불륜』의 주인공 린다의 입을 빌려 코엘료는 제네바를 이렇게 설명한다.

 “취향이 멋지다고 애써 말하지 않는 도시. 유리와 철로 된 거대한 고층건물이 없고, 고속도로가 많지 않은 도시. 나무뿌리들이 인도의 콘크리트를 뚫고 나와 행인의 발을 걸고, 공원의 신비스러운 작은 나무 울타리 주변으로 ‘자연은 원래 그런 법’이라며 방치해 둔 잡초가 무성하게 웃자라 있는 곳.”

 린다의 직업은 -왜 또 하필?- 신문기자다. 제네바의 거의 모든 가판대에서 찾아볼 수 있는 명망 있는 신문사의 인정받는 기자다. 그러나 린다 본인의 말로는 19만5000명(제네바 칸톤은 40만 명)의 시민이 살고 있는 제네바의 기자는 ‘세상에서 가장 지루한 직업’이다. 제네바에 도착한 날, 제네바의 최고 유력지 ‘트리뷘 드 즈네브’의 1면 머리기사 제목은 ‘베른 연방정부, 남녀 임금격차 해소 압박’이었다. 코엘료가 소설에서 예시한 제목은 ‘보수작업 후 한층 아름다운 모습으로 돌아온 유람선 제네바호’였다. 딱 그 정도가 소설과 현실의 차이?

 완벽한 삶에 진저리가 난 린다는 불륜에 손을 댄다. 모든 것이 너무나 잘 갖춰진 ‘화이트 브레드 월드(white bread world)’가 권태를 넘어 우울증을 불러올 만큼 견디기 힘들어지자 그는 모험을 택한다. 정치인이 된 옛 남자친구와 의도적으로 바람을 피운다. 레망호에서 멀지 않은 코르나뱅 기차역 주변은 아침 시간인데도 매춘부들의 은밀한 눈길로 분주하다. 내게 추파를 던지는 젊은 남자들도 눈에 띈다. 따분한 도시의 인간적 면모를 배려한 시 당국의 계획적인 관용인지 모르겠지만 제네바에서 매춘은 합법이다. 하지만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제네바의 한 단면일 뿐이다.

 호텔 근처에서 우연히 마주친 군사 전용 게시판에는 ‘2015년 동원훈련 스케줄’이 병과별로 빼곡히 적혀 있다. 보병은 내년 4월 7일부터 18일간, 포병은 4월 21일부터 17일간 1기 입소 동원훈련이 예정돼 있다. 스위스에서 18세 이상의 남자는 21주의 신병훈련에 이어 34세까지 여섯 차례 동원훈련을 받아야 한다. 동원훈련을 마치고도 30년 동안은 매년 실시되는 사격 훈련에 참가해야 한다. 게시판에는 올해 사격시험 불참자에 대한 재시험 안내문도 붙어 있다. 불참 시 1000스위스프랑(약 111만원)의 벌금 또는 1~10일의 구류에 처한다는 경고가 섬뜩하다. 참가자는 각자 소지한 총기를 갖고 정해진 사격장에 나와 300m 거리에서 조준사격을 실시하도록 돼 있다. 두 번까지 기회가 있지만 두 번째 사격에 드는 탄환값은 본인 부담이다. 불합격자는 합격할 때까지 재시험을 치러야 한다. 아름다운 자연에 가려 있지만 전국이 요새화돼 있는 나라, 모든 남자가 언제든지 총을 들고 싸울 준비가 돼 있는 나라가 스위스다. 영세중립국은 고슴도치처럼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힘을 토대로 쟁취한 지위다.

 10월 24일 ‘유엔의 날’에 맞춰 제네바에 있는 유엔 ‘평화의 전당’에서 열린 국제 평화회의. 평화를 위한 종교와 언론, 교육의 역할에 논의가 모아졌다. 언론이 과연 평화의 촉진자인지, 아니면 트러블 메이커인지 모르겠다는 시민사회의 불만이 쏟아졌다. 특히 지금 같은 소셜미디어 시대에 언론의 역할과 한계에 참가자들은 큰 관심과 걱정을 표명했다. 평화를 위해서는 관용과 공존의 정신이 꼭 필요하지만 철저한 대비도 중요하다는 것을 평화의 도시 제네바는 일깨워주고 있다.

 회의장에 온 취재기자 중에 혹시 린다 같은 사람이 없나 찾아봤지만 보이지 않았다. 역시 소설은 소설일 뿐이다. 대신 다른 걸 발견했다. “친구를 사귀려면 남을 존중해야 한다. 누구를 존중한다는 것은 좋아하지 않더라도 그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비가시옹 광장에 있는 한 초등학교 벽면에 새겨진 문구다. 제네바는 코엘료 소설의 무대가 될 만한 도시다. <제네바에서>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