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에 사업하다 폐결핵… 절에서 요양중 무상 느껴 출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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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28살때 폐를 앓았다. 수원의 부상집에 5형제 중 막내로 태어나 학교를 마치고 20대에 이런저런 사업에 손을 댔으나 별 재미를 못 봤다.
마지막으로 손댄것이 해방 후 혼란기에 양잿물제조업. 요즘 합성세제처럼 당시 양잿물은 세탁용으로 가정필수품이어서 전망이 좋았다.
그런데 양잿물을 제조하느라 노상 염소가스를 마신것이 원래 약하던 폐를 더욱 나쁘게 했다. 요즘이야 병에도 못 끼일 만큼 치료가 쉬워졌지만 그때만해도 결핵은 난치병. 1년도 안된 사업을 정리하고 휴양을 위해 산속을 찾아들었다.
충남 금산의 대둔산. 태고사에 자리를 잡고 투병에 들어간 나에게 예기찮은 인생의전기가 왔다.
태고사 조실로 있던 윤포산 스님과의 만남. 속명 윤달선. 이 큰 스님은 제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일본검찰에 검거돼 모진 고문 끝에 거의 죽게된 순간 문득 관세음보살의 계시를 받고 출가한 사람이었다. 내가 가지고 간 「이리스토텔레스」전집을 보고 어느날 큰 스님이 말을 건넸다. 토론이 벌어졌다.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사람의 지식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 어떻게 살아야 사람답게 사는 것인지-
나는 마치 걸음마도 못하는 어린애와 같이 말문이 막혔다. 1주야의 토론끝에 나는점점 어찌할 수 없는 유일한 선택의 길로 내 올려갔다.
세끼 밥먹고 잠자고 돈버는일에만 시간과 정력과 지력을 쏟아온 과거가 얼마나 어리석고 가엾게 보였던지-.
한달 만에 스님앞에 무릎을 끓었다. 내가 중이 되리라고는 내 자신도, 주변의 누구도 예기치 못한 사건이었다.
출가 후 1주일간의 모다라니 (범어로된 불교의 짧은주문) 경을 왼 끝에 얼마안가 나의 결핵이 거짓말같이 나은것은 세속적 표현으로는 믿음이 낳은 기적이라고나 할는지.
이후 34년. 나는 늘 이 큰스님과 나를 만나게한 속세의 인연을 감사하며 성불을 향한 고된길을 걷고 있다. 이범행 스님 <64·선학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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