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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정보 노려 각국산업스파이 각축|본사 김건진 특파원 미「시리콘·밸리」를 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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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제철공장이 없는 나라는 나라가 아니다』라는 말이 앞으로는 『반도체 생산능력이 없는 나라는 나라가 아니다』라는 말로 바뀔 날도 멀지 않았다고들 한다.
샌프란시스코만 남쪽 샌호제이 공항에 내리니 우선 공기부터가 다르다.
차를 타고 실리콘밸리에 들어서니 50km 이상에 걸쳐 산재한 수백개의 반도체 산업체들이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내셔널반도체회사 앞길을 지나느라니 아예 길거리 이름이 「반도체로」(세미컨덕터스트리트)라고 씌어있는 폼이 과연 세계반도체산업의 메카답다.
실리콘밸리주변엔 반도체 산업체뿐만 아니라 생명공학과 레이저공학의 산업체 등 21세기를 리드해나갈 산업의 중추들이 밀집돼 있다.

<반도체산업의 고장>
반도체산업이란 간단히 말해서 가능하면 좁은 면적에 더 많은 논리 및 기억장치를 넣을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다.
가령 종래의 개념대로라면 인간의 두뇌와 비슷한 기능을 가진 컴퓨터를 제조하려면 수십억개의 세포를 진공관으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그 크기는 아마도 서울시 전체의 크기만 할지도 모른다.
문제는 누가 먼저 이러한「크기」를 최대한 극소화시킬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느냐에 달려있다.
실리콘밸리가 자리잡고 있는 서니베일 지역은 원래가 포도밭과 같은 과수원 지대였다. 이곳에서 자동차로1시간만 가면 세계적으로 포도주로 유명한 나파밸리가 있으며 지금도 개발이 아직 안된 곳엔 비닐하우스가 곳곳에 눈에 띈다.

<인텔사 입주로 시작>
허허벌판이던 과수원지대가 일약 세계적인 반도체단지로 탈바꿈을 시작한 것은 지난 60년대 말 인텔과 마이크로 디바이스 등의 미국회사들이 이곳에 입주하면서부터였다.
서부의 명문 스탠퍼드대학을 배경으로 하고있는 실리콘 밸리는 자연적인 측면에서도 초 정밀의 기술을 요하는 반도체산업의 3대 필수요건인 양질의 물과 햇빛, 그리고 습도 없는 공기 등이 풍부하게 공급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선발기업들은 7O년대에 들어와 그야말로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 인텔사의 경우는 이미 연간 판매고가 10억 달러를 넘어섰다. 후발 기업들도『인텔의 기적을 노리자』면서 실리콘계곡에 속속 집결했다.
81년 한햇동안에만도 12개 이상의 기업체가 이곳에 몰려들어 지금은 4백개사 이상이 자리잡고 있다.
지난 80년 현재 전세계 반도체산업체의 판매고는 1백40억 달러였으나 전문가들은 현재의 추세라면 오는 90년까지는 이의 4배가 넘는 5백80억 달러의 판매고를 올릴 것으로 전망한다.
「브라운」캘리포니아 주지사의 표현대로『자원고갈시대의 새로운 총아』로 등장한 실리콘계곡이 이렇듯 급격한 발전을 하고있는 가장 큰 이유는 반도체산업의 발전가능성이 거의 무한대에 가깝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현재 가장 많이 팔리는 64-K RAM(Randem Access Memory)이라고 불리는 미머리칩은 6만4천 개의 자료를 저장할 수 있는데 오는 1990년까지는 1개의 칩속에 미 대륙전체의 도로망보다 더 복잡한 회로패턴이 개발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경우 아직 초보단계인 4-K로 시작되고 있으나 미국과 일본 등 선진국들은 이미 64-K를 거쳐 이젠 256-K 고지점령을 의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런 단위가 계속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경우 앞으로는 메가(백만단위) 기가(10억대) 테라(조)등의 낯선 용어들이 사용될 것이며 이런 발전속도가 어디까지 갈 것인가는 아무도 모르고 있다.
우리가 방문한 횰리트-패커드사도 그랬지만 대부분의 반도체회사들의 건물모양은 웬만한 아담한 주택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모양으로 지어져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사보도 귀한 정보원>
공장뿐만 아니라 종업원들의 높은 문화수준을 반영이라도 하듯 이곳에 있는 각급 학교나 극장 등 문화시설의 수준도 최고급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겉으로는 평화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는 실리콘밸리의 모습을 한꺼풀만 벗기고 들어가 보면 대단한 열기가 그곳에 숨어있음을 알 수 있다.
이곳엔 기실은 소련·일본 스파이를 비롯해서 앞선 기술과 정보를 캐내려는 세계 각국의 산업스파이들이 우글거리고 있는 전투장인 것이다.
정보수집전은 너무도 치열해서 실리콘밸리의 반도체산업에 관한 각종서적과 인쇄물은 말할 것도 없고 각 기업체가 종업원용으로 발행하는 사보 등도 모두가 산업스파이들에겐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일본의 추적>
이러한 치열한 산업스파이전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것은 일본이었다. 일본의 NEC회사는 가장 빨리 미국의 개발자료를 빼낸 덕분에 일본 기업 중에서 가장 먼저 실리콘밸리에 진출할 수가 있었으며, 지금은 미국을 따라잡겠다고 호언하고 있다.
악착스런 일본기업들은 이제는 제품을 미국 시장에 침투시키는 단계까지 발전, 이미 전자기억장치시장분야에선 미국기업의 판매망에 큰 위협을 가하고 있다.
NEC이외에도 후지쓰(부사통)·히따찌(일립)같은 의사들은 실리콘밸리에서 완전한 경쟁자로 성장, 일찌감치 터를 잡았던 인텔, 텍사스인스트루먼트, 모터롤러 등 미국기업들을 추격하고 있다.
50년대 말에 개발된 IC(집적회로)의 경우만 해도 일본 기업들의 성장속도는 대단하다. 지난79년 현재 미국10대회사의 IC생산능력은 37억 달러 어치였는데 일본산대회사의 생산능력은 16억 달러로 추격해왔다. 같은 기간에 유럽10대회사의 IC생산능력은 일본의 3분의1인 5억6천만 달러에 불과했다.
「스즈끼」(검목선행) 일본수상은 작년 워싱턴의 내셔널프레스클럽에서 행한 연설에서『비록 우주과학은 미국이 앞섰으나 앞으로 일본은 반도체분야에선 미국과 경쟁을 해봄직하다』고 뽐내기도 했다.
실제로 일본은 81년만 해도 미국 내에서 소비된 64-K RAM칩의 70%를 공급하는 성장을 보였다.
미국의 모터롤러, 텍사스인스트루먼트 등이 우수한 미머리 칩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어 일본세가 꺾일 전망이지만 미국 전문가들도 64-K RAM시장에서 일본의 비율이 50%이하로는 떨어지지 않으리라고 보고있다.
일본이 미국에 분명히 뒤지고 있는 분야는 논리회로인 마이크로 프로세서다. 그저 기억하는 것과는 달리 기억내용을 논리적인 순서에 따라 행하도록 하는 칩 분야에서 일본은 아직 미국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일본도 이 사실을 잘 인식하고, 기업·정부·학계가 삼위일체가 되어 논리분야에서 미국을 추격하는 시스팀을 굳혀가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는 초정밀기술산업이 어디까지 발전할 것인가는 아무도 예측할 수가 없기 때문에 세계 각국은 이제부터라도 이 분야에 발을 들여놓아야겠다는 분위기가 팽배하고 있다.

<가격도 급격히 하락><기술혁명의 경쟁시대>
진공관이 트랜지스터로, 이것이 다시IC로, 이번엔 다시 LSI와 VLSI(초대규모 집적회로)로 기술혁명은 한없이 뻗어가고 있는 것이다.
경쟁이 너무 치열하다보니 이제 반도체산업이 떼돈을 벌던 시대도 지났다. 오히려 상당수의 기업들은 악착같이 달려드는 후발 기업들의 추격을 뿌리치지 못해 커다란 재정적인 위협을 받고있는 형편이 됐다.
한 전문가는『지금까지는 선발 반도체 산업들이 사막에서 혼자 물을 파는 식의 폭리를 취해왔다』고 비유하면서『그러나 또 다른 사람이 물탱크를 들고 사막에 나타나면 이윤이 감소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표현했다.
수많은 기업들이 대량생산을 시작하면서 가격도 급격히 하락했다. 한 예로 80년에 개당 80달러하던 미머리칩이 2년만에 10달러 선으로 폭락했는데 금년 말에 가선 다시 7달러 선으로 내려갈 전망이다.
그만큼 가격경쟁과 시장경쟁이 치열해, 이제는 각 회사들은 박리다매의 능력을 확보하거나 보다 높은 초정밀기술을 먼저 개발하려고 혈안이 돼있다.
이런 상황에서 갖가지 기발한 아이디어도 속출하고 있다. 세크 테크놀러지 회사는 정전이 돼도 데이터가 계속 기억되는 칩 개발분야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다.
이러한 기술의 경쟁적인 개발 때문에 보통 미국내의 새로 설립된 회사가 2년 내에 생존할 수 있는 확률은75%정도인데 비해 실리콘밸리에 진출한 업체들이 6년 이상 생존할 수 있는 확률은 95%나 되고 있다.
휼리트-패커드회사의 경우 72년에 4천8백만 달러이던 판매고가 10년만에 36억 달러로, 순이익은 3천8백만 달러에서 3억l천2백만 달러로, 총 자산은 3억8천3백만 달러에서 28억 달러로, 종업원수는 2만1천에서 6만4천명으로 급성장, 대표적인 성공사례로 손꼽히고 있다.
앞으로 전개될 3C(컵퓨팅, 캘큐레이팅, 커뮤니케이션 드루 테크놀러지)시대가 과연 어디까지 발전할 것인지는 두고볼 일이지만 19∼20세기를 지배했던「철의 시대」가 이제는「반도체의 시대」로 바뀌어가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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