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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인간가족|이산 33년만에 상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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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우째 이래 늙었노.』
8순의 김점순 할머니(81)가 지난해 8월8일 44년만에 중공에서 귀국하면서 34년만에 만나는 아들을 보고한 첫마디다. 17,16세 한창나이에 품에서 떠난 아들들이 장년이 넘어 눈앞에 나타났으니 늙어 보이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어머님은 아직 정정하십니다』나이로 미루어 예상했던 만큼 40도 각도로 굽은 허리를 지팡이에 의지하고 비행기에서 내린 어머니를 안고 아들들은 격려의 한마디를 해주지 않을 수 없었다.

<막내는 아직도 중공에>
『5년넘어 제사를 모시던 어머니입니다. 그것도 소식만 들은 것이 아니라 이렇게 만나게까지 되었으니 그 정이 각별해요』
지금 김할머니를 모시고있는 차남 박병희씨 (50·경기도 성남시 판교동247)는 돌아가신 부모님이 다시 살아난 경우가 바로 자신들의 경우라면서 아직도 꿈만 같다는 말을 되풀이 한다.
김 할머니는 일제때 홀몸으로 대구에서 어려운 살림을 견디다 못해 37년 친정이 이사가 있는 중국 료령생무순현으로 4자녀를 데리고 떠났다.
당시 김할머니는 36세. 장녀 박순자씨 (61· 대구시 신암동)는 15세, 장남 철수씨(54·농업·경기도 평택군 현덕면 덕목리)는 9세, 차남 병희씨는 5세었으며 막내 덕향씨(47·중공거주)는 2세였다. 이후 철수씨는 17세에, 병희씨는 16세에 각각 고국으로 돌아왔으며 어머니와 막내가 중공에 남은 채 6·25로 소식이 끊기고 말았다.
김할머니의 나이가 7순이 가까와졌을때 형제가 의논,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74년 중공과의 서신교환이 가능해지자 「혹시나」하는 마음에서 요령생으로 편지를 띄웠고 어머니의 생존 소식을 연락받게 되었다. 그후 7년에 걸쳐 적십자의 적극적인 주선으로 김할머니의 귀국수속에 나섰다. 그 결과 지난해 8월 혈육상봉이란 극적인 감격을 맛 볼수 있었다.
형제 가운데 수속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사람은 차남 병희씨. 약국경영으로 3남매가운데 경제적인 형편도 가장 나아 병희씨는 자신이 평생 어머니를 모시겠다고 한다. 『사실 어머니 품을 가장 늦게 떠난 사람이 나예요. 어머님과 가장 정이 들었던 사이라고 할까요. 16세에 헤어졌지만 그때까지도 난 어머니의 젖가슴을 만지며 잠들었답니다』
부인 임종난씨(46)와 무기(19) 혁기(17·고2) 만기(15·중3) 현숙(10·국3)등 3남1녀의 자녀를 둔 박씨는 새 식구가 된 어머니와 처음 보는 며느리 손자간의 사이가 의외로 좋아 다행스럽게 생각하고있다.
『집으로 오신 첫날 식구들 앞에서 어머니의 무릎을 베고 젖가슴을 만졌지요』
34년의 세월이 안겨준 모자간의 거리감도 없었던 것은 아니라고 박씨는 솔직히 털어놓았다. 그러나 박씨의 이같은 행동은 순간적으로 그 거리감을 없애주었으며 처음 대하는 식구들 간의 어색한 느낌도 가셔 졌다고 했다.
김할머니가 중공서 선물로 가져온 것은 흰 광목이불 두 감과 비단 두 감.

<고이 간직한 조선은행권>
며느리들에게 줄 선물이었다. 또 한가지는 40년 넘어 고이 간직하고 있었던 조선은행권 5백10원. 해방이전 자그마한 집 한채는 마련할 수 있었던 이 돈을 김할머니는 언젠가 고국에 와서 쓸수 있으리라고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 화폐가 이곳에서도 쑬모가 없다는것을 안 김할머니의 절망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중공에서 이웃마을 나들이도 한번 못한 채 한국인 사회속에서 만 산 김할머니가 한국의 소식을 알리는 없었다.
『그곳에서 물으니 여긴 옷감이 모자란다기에…』
두텁고 무겁기만 한 광목이 별 쓸모가 없음을 안 할머니는『그곳에 있는 딸에게나 주고 올걸』하면서 후회했다.
판교에서 5일마다 서는 장날은 할머니에게 옛날의 추억과 신기함을 주는 날이다.
자녀들이 모아준 용돈으로장날이면 이런저런 물건을 산다.
장터에 나간 첫 날, 메밀묵 세덩이를 사와 말아 먹으면서 옛날 메밀묵만 못하다고 불평을 했다.
그러나 3천원으로 살 수 있었던 꽃무늬 치마에는 아직도 크게 만족해 하고 있다.
『워낙 연로하신 분이라 집안일을 일체 못하시도록 하고 있어요. 그러나 당신의 내복은 꼭 손수 세탁하시겠다고 하셔서 그일만 하시게 하고 있어요.』
50을 바라보는 나이에 시어머니를 맞아 들이게된 며느리 임씨의 말.
시어머니나 며느리 모두가 그동안 자신들의 의무를 못했다고 생각하고 있어 큰 어려움은 없다.

<중공서 꽃씨도 가져와>
『중공에서 꽃씨를 가져오고 또 소채도 키워보고 싶다고 하셔서 봄에는 서너평 정도의 밭을 할머니를 위해 마련해드리려고 해요.』어떤 일이라도 하고싶다는 김할머니. 그러나 거동이 불편해 서너평 정도의 땅이면 족하지 않겠느냐고 며느리는 가늠해 보고 있다.
식사는 가족이 모두 함께한다. 그러나 요즘은 할머니에게 독상을 차려 주고 있다. 천천히 밥을 먹는 할머니가 마음놓고 식사하도록 배려한 것.
판교에서는 중공에서 온 할머니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동네 부인네들은 물론 아이들까지 할머니에게서 듣는 이야기는 신기하다. 때문에 손자손녀들은 그런 할머니가 자랑스럽다.
특히 할머니와 기거를 같이 하는 막내 현숙양은 할머니를 부축해 마을 나들이 가는 일이 즐거움의 하나다.
『우리나라에는 헤어져 사는 가족이 많다고 해요. 모두 우리처럼 만나 함께 살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현숙양의 바람이다.

<김징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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