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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쏟아져 들어온 서양문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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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한미수호 통상조약 채결을 계기로 은둔국 조선은 비로소 서양문명의 우수성에 눈뜨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에서 도입된 서양기술 중 특기할만한 것은 전기. 조선정부는 1883년 보빙사 일행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부터 전기도입에 관심을 가졌고, 다음해 9월 드디어 미국「에디슨」전기회사에 궁중에서 쓸 전기시설 일체를 주문했다.

<「서양 도깨비불」>
갑신정변의 발발로 전기도입이 지연되긴 했으나 1887년 미국인기술자「W·마케」가 내한, 경복궁내에 처음으로 전기를 설치했다.
전기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인식은 경탄과 두려움이 뒤섞인 것이었다. 사람들은 전기를 「서양 도깨비불」이라 불렀다. 발전기를 돌리던 증기기관의 냉각수가 궁내 연못에 흘러들어 물고기들이 떠오르자 『증어는 망국의 징조』라는 고사를 들어 나쁜 소문을 퍼뜨리기도 했다.
전기가 일반에 보급되는데는 그로부터 10여년이 걸렸다. 당시 한국에 와있던 미국인 청부업자「헨리·콜브런」과 「해리·보스트위크」가 정부에 본격적인 전기사업을 제의하여 허가를 받으면서부터였다.
이때 왕실이 전기사업을 허가한 직접적인 동기는 고종의 빈번한 홍릉 행차를 보다 편하게 하려는데 있었다. 고종은 비명에 간 민비를 못 잊어 자주 청량리 밖 홍릉에 거동했는데 이때마다 경비가 10여 만원에 이르고 행사가 번잡하기 짝이 없었다.
「콜브런」은 왕의 행차에 최신 문명의 이기인 전차를 사용할 것을 건의했고, 왕실로부터 허가를 얻자 한성전기회사를 설립했다. 그는 일인기술자를 불러 선로를 가설하는 한편, 동대문 옆에 발전소를 건설, 75㎾전류6백V짜리 발전기, 1백 마력 짜리 기기, 보일러 등을 설치했다.
1899년 음력 4월초파일 이 땅에 처음으로 전차가 선보였다.
40명 정원의 회전식 개방차 8대, 황실용 귀빈차 1대 등 모두 9대. 전차가 개통되자 서울은 물론, 지방각지에서도 신기한 전차구경을 하러온 사람들로 붐볐다.
운전사는 모두 일인으로 일본 교오또 전철에서 온 사람들이었으나 차장만은 한국인이었다. 찻삯은 한번에 5전.
전차개통 1주일만에 사고가 났다. 종로 파고다공원 앞길에서 갑자기 뛰어든 어린아이를 지나던 전차가 치어 죽였다.
현장에서 이를 목격한 분노한 군중들은 전차에 불을 지르고, 동대문에 몰려가 발전소마저 파괴하려했다. 당황한 발전소 측에서는 주위에 전선을 치고 6백V의 강전류를 흘려보내 노한 군중들의 접근을 막았다.
이밖에도 그해 여름 가뭄이 계속되자 그것이 전차 때문이라는 등 전차를 비방하는 소문은 끊이지 않았다. 이런 속에도 전기사업은 계속 발전.
남대문·용산까지 그 노선이 확장됐고, 발전설비도 더욱 늘려나갔다. 이와 함께 전등사업도 시작되어 진고개(이현·지금의 충무로)일대엔 1900년 6월까지 모두 6백개의 전등을 달았다.

<굴뚝 높은 기관차>
철도는 근대화 추진의 가장 중요한 요소의 하나로 조선정부가 일찍부터 관심을 둬온 사업이었다.
그전에도 일본·미국을 다녀온 사신들이 철도의 중요함을 전해오긴 했으나, 철도에 대해 실감을 갖도록 한 것은 1889년 주미대리공사 이하형이 귀국하면서 극히 정교한 철도모형을 가지고 와 왕 앞에서 소개하면서였다.
그러나 조선정부가 주체적으로 철도건설을 추진하기 전에 일본은 철도부설에 있어 기선을 잡았다. 1894년 청일전쟁시 한국 내 철도부설의 필요성을 통감한 일본은 조선정부에 압력을 넣어 인천∼노량진의 철도부설권을 획득하려했다.
이때는 러시아·프랑스·독일이 주체가 된 소위 3국 간섭의 시기로 일본의 조선에 대한 영향력이 크게 쇠퇴하기 시작한 때. 그렇잖아도 일본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려던 조선은 이를 좋은 기회로 생각. 당시 미국공사 「앨런」을 통해 철도건설을 제외해온 미국인 실업가「제임즈·R·모슨」와 접촉. 1896년 3월 그에게 경인철도 부설권을 넘겨줬다.
「모스」는 회사설립 즉시 선로측정작업을 실시했고 다음해엔 인천 우각리에서 기공식까지 올렸다.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선로부지 매입시 일인들의 방해를 받은 것을 비롯, 자금조달문제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본국에서 자금조달을 위해 동분서주했으나, 당시 조선의 실정을 잘 알지 못하는 미국인 자본가들은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 사정을 탐지한 일본은 재빨리 부설권 인수를 위한 교섭을 시작, 경인철도인수조합을 만들어 「모스」에게 접근, 끝내 조선정부 몰래 양도계약을 체결했다.
경인철도인수조합은 부설권 인수즉시 경인철도합자회사를 설립, 1899년 4월 다시 기공식을 올리고, 3개월만인 7월8일에는 인천∼서울사이 약42㎞의 전구간을 개통시켰다.
이때 경인철도를 처음 달린 기관차는 미국 브루크스사가 제작한 모갈형 탱크기관차. 기관차의 몸체에 비해 굴뚝이 유난히 크고 높은 것이었으나, 당시로서는 세계 최신형의 증기기관차였다.
열강의 각축 속에서 조선이 가장 관심을 가졌고 또 필요로 했던 것은 서양의 새로운 무기기술이었다. 대포와 군함으로 무장한 새로운 군사력에 의해 타율적으로 문호개방을 강요당했던 조선으로서는 가장 급선무가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부국강병이었다.
무기기술의 수용은 신무기도입과 제조, 그리고 신식군대의 양성 등으로 추진되었다. 1880년 통리기무아문에 군물사·기계사를 설치, 일본과 청에 사절단을 파견하여 신식무기구입과 기술습득을 위해 노력했다.
1881년 일본 요꼬하마에 와있던 한 미국상사를 통해 미제소총 4천정을 구입한 것을 비롯, 다음해엔 일제 무라따총, 청국제 대포 10문, 영제 소총 1천정 그리고 미제 캐틀링포 6문과 탄약, 레밍턴 소총 3천정, 피바디 마르티니 소총 1천정 및 탄약 20만 상자를 주문, 구입하는 등 무기기술 도입에 열을 올렸다.

<탈곡기도 들여와>
근대식 군사훈련은 1881년 별기군을 창설하고 일인 군사교관을 초청, 신식훈련을 시킴으로써 시작됐으나 본격적인 군사훈련은 한미수호조약 체결 후인 1887년 최초의 사관양성기관인 연무공원이 설립되면서부터.
조선정부는 1883년 수교직후부터 계속 미국정부에 군사고문만을 보내줄 것을 요구했는데, 미국정부는 1887년 「월리엄·M·다이」장군을 대표로 한 3명의 군사교관단을 한국에 파견했다.
그러나 새로운 군대를 운영하기엔 당시 관료사회가 너무도 부패했고, 원생들 또한 거의가 양반집 자제들로서 엄격한 군사훈련을 참아낼 자세가 돼있지 않은 상태였다.
게다가 초빙된 교관에 대한 급료 또한 제때 지급되지 않아 번번이 문제가 됐다.
그래서 학생모집도 단 1회에 그쳤고, 이곳을 거쳐 장교가 된 사람들도 격변하는 당시 정치 속에서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으며, 설치 6년만인 1894년 갑오개혁으로 연무공원은 완전히 문을 닫고 말았다.
농사기술도입도 활발했다. 농무목축 시험장은 1883년 민영익과 함께 갔던 무관 최경석이 귀국 후 설치한 것. 미국 체재시 보스턴 시에서 열린 박람회를 참관한 그는 미국산 농기구의 우수성에 크게 감명 받았고, 이어서 한 시범농장을 방문하고는 농업시험장 설치의 필요를 절실히 느꼈다. 그후 다시 워싱턴에 돌아온 그는·농무성을 방문, 탈곡기롤 수입하고 각종 농작물의 종자를 얻는 한편 농업기술자의 한국파견을 요청했다.

<우표는 미서 인쇄>
귀국 후 그는 국왕에게 새로운 농업기술의 도입을 강력히 주장했고, 왕도 그의 의견을 좇아 서울 망우리부근에 광대한 토지를 내려 시험장을 세우고 미국인 기술자들로부터 농업기술을 전수 받도록 했다.
우편제도는 홍영식과 「묄렌도르프」가 주동이 돼 1884년 10월 우정국이 개국됐으나 곧이어 갑신정변이 일어나 중단. 다시 정상을 찾기까지는 10년이란 세월을 보내야 했다.
1895년 6월 정부는 서울과 인천에 우체사를 개설, 우편업무를 재개했다.
이때 사용된 우표는 미 워싱턴의 「앤드루·B·그레이엄」조폐회사에서 석판으로 인쇄한 것으로 5푼·한돈·2돈5푼·5돈 짜리의 4종. 디자인은 중앙에 태극기, 그리고 네귀에는 왕실의 문장인 이화를 새겨 넣었다.
이어서 1897년 5월에는 주한미국공사 「존·M·실」의 도움으로 워싱턴에서 열린 제5회 만국우편연합총회에 주미대리공사 이범진을 파견했고, 같은 해 6월24일에는 만국우편연합에 가입, 정식 회원국이 됐는데, 이는 한국최초의 국제기구가입이었다. <정우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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