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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보선 전 대통령의 증언|"유혈은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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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가장 길었던 사흘」은 5.16의 격동 속에서 그 당시 권력의 중심부에 자리했던 사람들의 책임 있는 선택을 그들의 증언을 요약해 정리한 것이다.
초점은 대통령 윤보선, 총리 장면, 그리고 육군참모총장 장도영씨의 거취였다. 그날 이후 은둔생활에 들어간 장면씨는 「내각 총사퇴」라는 당시의 그의 선택에 대해 『이런 사태가 올 것을 사전에 알고 있던 대통령이 적극 지지에 나서고 믿었던 육군총장마저 양다리를 걸친 것을 알고선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그 길 하나뿐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내가 수녀원에서 겁에 질려 숨어 있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17일 이른 시간에 나는 두사람의 그런 행동을 알고 있었다고 주장하면서 다만 그 일은 아직 밝힐 단계가 아니다』라고 했었다. 그는 끝내 밝히지 않은 채 갔지만 그의 이 같은 의혹을 더욱 굳혀준 것이 유원식씨의 증언이다. 5.16주체인 유 대령은 혁명 1주년 때 대통령과의 사전접촉이 있었다고 공개됐다. 유씨는 지금도 심명구씨와 그 밖의 두 사람이 이런 사실을 입증해줄 것이라고 주장하고있다.
「가장 길었던 사흘」은 이 문제를 다루는 것이 그 의도가 아니었다. 또 대통령에 대한 의혹도 이런 유씨와의 엇갈린 주장 때문이기보다 5·16 아침 군 수뇌의 방문을 받았을 때의 대통령의 태도에 연유한다.
『올 것이 왔다』는 5·16혁명 제일성으로 혁명주체와 사전접촉이 있었던 것으로 「오해」 를 받았던 윤보선 전대통령.
윤씨는 20년이 지난 최근 당시의 상황과 자신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있다.
『5·16혁명이 일어난 16일 새벽4시께 장도영 참모총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일부 군인들이 한강을 넘어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상황이 매우 유동적이라는 보고였다.
내가 듣기에는 잠시 피신을 하는게 좋겠다는 뜻으로 들렸다. 그러나 총리도 소재파악이 안 되는 상태에서 나마저 도피를 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매그루더」사령관과 「그린」미 대사 대리를 들어오도록 연락했다.
그들은 그러잖아도 들어올 예정이었다며 즉시 16일 아침 나에게 왔다. 「매그루더」사령관은 전방에서 4만명만 동원하면 진압이 가능하니 나더러 승인해 달라는 것이었다.
당시 미국은 그해 2월부터 한국에 군사쿠데타가 일어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에 군사혁명이 나면 장면정권을 지지하라는 훈령을 미리 보내놨었고 「매그루더」사령관과 「그린」대사대리는 이를 그대로 이해하려는 눈치였다.
나는 전방에서 병력을 뽑겠다는 그의 제안을 즉석에서 거부했다.
그 이유는 첫째 공산당이 침공해올 우려가 있고 둘째는 필연코 유혈사태가 발생할 것으로 예견했기 때문이다. 「그린」대사대리가 호헌을 주장했지만 나라가 있고 호헌이지, 없어진 다음에야 무슨 호헌이냐는 생각에서였다.
내가 「매그루더」사령관의 진압군 동원계획을 거부한 것은 무슨 딴 생각이 있어서였다는 비난을 그후 받았지만, 지금 내가 만약 그 자리에 다시 있었다 하더라도 그 같은 결정을 반복했을 것이다.
혁명직후 유원식 대령이 전부터 나와는 잘 아는 사이였다고 말한 사실과 혁명직후 내가 <올 것이 왔다>고한 말을 결부시켜, 마치 내가 군사혁명을 기대했거나 사전 가담한 것과 같은 오해를 일부 국민들이 하고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지만 나는 5·16혁명과 전혀 관계가 없음을 분명히 밝혀둔다. <올 것이 왔다>는 내 말은 군사혁명을 바라고 있었다거나 예측해서가 아니었다.
당시 항간에서는 3월 위기니. 4윌 위기니 해서 조용한 날이 없었고 뭔가 일어날것 같은 조짐이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5·16 아침 장도영·박정희 장군이 나에게 왔을 때 나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너무도 빨리 왔기에 나온 소리였다.
내가 군사혁명을 속으로 바랐다거나 그들과 사전양해가 있었다면 왜 박 소장이 그렇게 간청했던 계엄선포의 추인과 혁명지지 성명발표를 거부했겠는가.
나는 장 내각이 사퇴결의를 할 때까지 끝내 개엄령 선포를 인정하지 않았었다.
유 대령과의 사전면식도 전혀 사실과 다르다.
내 친구 중에 심명구라는 사람이 있어 가끔 청와대에 들어와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하곤 했었다. 60년 말로 기억된다.
하루는 이 친구가 들어와 유원식이란 대령이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는데 한번 나를 만났으면 한다고 전했다.
궁금하기는 하나 대통령의 입장에서 쿠데타를 하겠다는 장교를 만날 수도 없고 해서 민주당각료 한명에게 사실을 말했다. 그랬더니 그 각료도 그런 말이 있는데 별게 아니라고 가볍게 말해줬다.
61년 정월 초하루였다. 청와대에서 신년하례를 받고 있는데 친구 심이 사복을 입은 뚱뚱한 젊은 친구를 대리고 들어와 <이 사람이 유 대령>이라고 소개했다.
그때 비로소 나는 유 대령을 처음 만나 잠깐 악수만하고 헤어졌다.
그후 4월달 인가해서 우이동에 나갔다가 유 대령의 부친인 유림씨 장례식에서 잠깐 본 기억이 있을 뿐이다. 지금도 박 소장이 왜 유 대령을 데리고 청와대로 왔는지 모르겠다. 내 짐작으로는 유 대령이 <평소부터 윤 대통령을 잘 안다>고 말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아직까지도 5·16때 내가 군사혁명에 찬동하여 협조한 것으로 오해를 하는 사람이 있는것은 당시의 상황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때 대통령의 지위는 상징적 존재에 불과해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아무런 권한이 없었고 장 총리이하 각료들이 숨어버려 사태를 책임지고 처리할 사람이 없었으며 국민들의 장정권에 대한 신임이 떨어진데다 휴전선 이북에서는 북괴군이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내가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 합헌 적인 정권을 쓰러뜨리고 군사혁명을 지지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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