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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인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13년 만에 한국을 다시 찾은 어느 외국인 친구는 급속도로 변모한 서울의 모습에 놀란다. 즐비한 고층빌딩, 자동차의 홍수, 그리고 화사해진 시민들의 옷차림- 어느 국제도시에 못지 않은 발전상이라고 칭찬이 한창이다.
그런데 서울에 변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단다. 서울의 인도가 바로 그것이다. 노폭이 좁고 지면이 고르지 못한 보도는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변한 것이란 깔아놓은 블록의 색깔과 그 위를 지나다니는 행인들의 수라고 한다.
인도의 절대면적은 그대로 둔 채 하늘로 솟고 옆 공간으로 뻗어나간 서울의 가분수 적인 발전은 이미 뜻 있는 전문가들에 의해 자주 지적되어 왔다.
서울의 인도-각종 공사로 파헤쳐진 후 제자리에 놓여지지 않은 울퉁불퉁한 블록들. 낙오병의 총대처럼 길 한가운데 버티고 서있는 전주, 그리고 보도의 반 이상을 침식한 가로수. 갑자기 노면이 좁아져 겨우 두어 사람만이 스쳐 지나가야 하는 지하도입구의 측면을 빠져나와 다시 육교로-.
곳곳에 움푹 패고 자갈이 드러난 계단을 조심조심 내려오면 차도인지 인도인지 분간이 안가 머뭇거리다가 사방에서 자동차의 경적세례를 받고 나면 진땀이 흐른다. 이제 더 이상 걷고 싶은 마음은 싹 가셔버린다.
뉴욕의 타임즈 스퀘어도, 동경의 은좌통도 붐비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들은 인파에 시달렸으면 시달렸지 방치된 장애물에 의한 불편을 느끼지 않는다. 그래서 서울에 상주하고 있는 외국인은 많은데 정작 걸어다니는 그들을 보기는 드물다.
걷는 즐거움-서울시민들은 성장이란 햇볕에 가리워 이 즐거움을 잃어가고 있다.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정부에서는 공항을 비롯하여 육운·해운·철도의 확장공사 청사진을 놓고 한참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다. 특히 대도시의 교통체증을 해소키 위한 강력한 방안을 검토중이라니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자동차에 의한 교통체증을 해소하는 것 보다 인도의 미비로 인한 인파의 교통체증을 없애는 것이 더 시급하고 절실하다. 도심지에서 최소한 서너 정거장 정도의 거리, 이를테면 세종로에서 서울역 정도는 짜증을 안내고도 걸어갈 수 있도록 인도를 정비, 확장하자.
그래서 걸어다니는 시장, 정장을 한 경찰서장, 그리고 일반시민들이 길에서 자주 마주쳐도 안쓰럽지 않고 가벼운 눈인사를 주고받으면서 지나칠 수 있는 쾌적한 인도, 물리적으로 개선된 보드가 하루속히 마련되었으면 한다.
이는 비단 산책을 즐기는 한 시인의 낭만스런 바람만이 아니라 멀지않아 몰려올 외국인들의 눈길이 제일 먼저 와 닿는 수도서울이 시급히 해결해야 할 가장 긴급한 프로젝트중의 하나다.
이 준 영<시인>
▲1943년 대구출생 ▲59년「자유문학」에 시로 데뷔, 시인회의동인 ▲74년 시집『빛이 모이는 음지』출간 ▲현재 주한미대사관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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