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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송유씨 집성촌|충북 옥천군 안남면 도농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아청을 끼얹은 듯 짓푸른 대청호 물 비늘이 손에 잡힐 것 같다.
옥천 인터체인지에서 속리산 길로 접어들어 8㎞. 한 굽이를 돌고나면 또한 굽이가 닥쳐들고 한 고개를 넘으면 또한 고개가 숨이 찬다.
인포교를 건너 아스팔트길을 버리고 오른쪽으로 돌면 오솔진 황토 길. 느티나무가 줄을 진 실개울을 따라 4㎞를 더 들어가면 길월봉(문봉) 꾀꼬리봉(앵봉)이 좌우에서 버티며 길을 막는다.
산아래 옹기종기 군락을 이룬 충북 옥천군 안남면 도농리 유씨 마을. 뺑 둘러가며 호군공 후손 1백20여 호가 3백년을 내려 살고 있다.
이 마을의 종가 댁인 34세손 유동혁 옹(72)의 댁을 찾는다. 서울고법 유효봉 판사가 옹의 둘째아들. 유 옹의 장남 정봉씨(50·안남면 농협단위조합장)와 3남 형봉씨(32·대전 동양백화점근무)등 3형제가 모두 대학을 나와 이 마을에선 유일하게 자손공부가 제일 높은 집안으로 소문나 있다.
『나의 어른께서는 돈놀이하지 마라, 술장사하지 마라, 노름하지 말라는 3가지 가훈을 남기셨어요. 이런 정신이 흘러내리니 사람들 성품이야 착하고 유순하기 이를 데 없지요. 유 옹은 사람들이 너무 유순하다보니 소처럼 땅이나 갈았지 세상에 발벗고 나서 큰소리치는 자리하나 얻지 못했다며 껄껄 웃는다.
때문에 세 아들 중에 한사람을 판사 만들었느냐고 묻자 유 옹은 정색을 한다.
『해방 전까지 군·면서기 10년, 그 후 전매청직원으로 20년을 지내다보니 공무원생활이 그런 대로 괜찮아요. 자식들한테는 순사만 되지 말고 그저 좋은 직장 얻어 살라고 했지요. 둘째만 등잔불 밑에서 저 혼자 공부에 파묻히더니 서울대 법대를 들어가고 판사가 되더군요.』
유 옹은 나라이름이 바뀌면서 세파를 피해 조상들이 깊이깊이만 숨다보니 너무 외진 곳에 터를 잡았다고 한다. 지금도 큰길에 잠간서는 버스가 하루 4번, 마을까지 4㎞ 오솔길엔 하루종일 가도 자동차구경하기가 힘들다.
『옛날엔 소학교를 마치고는 대전 중에도 못 다녔어요. 10여년 전부터 마을형편도 나아지고 하니까 상급학교에 보내기 시작해서 고등학교 졸업생이 90%정도 됩니다.
유 옹의 장남 정봉씨는 외부와 차단되다 시피한 곳이라 마을사람들은 자연 고집이 세고 남과 잘 어울릴 줄을 모른다고 했다.
한집에 평균 벼20섬을 거두고 밭농사와 양잠으로 가구당 소득은 1백20여만원 정도.『어느 집 어른이나 안사람 잘 맞아들여 아들 많이 낳자는 말씀은 하셨어도 돈 많이 벌고 벼슬 따라는 말은 안 하셨어요.
문중의 수난사가 정리된 것은 없지만 고려 때 명문으로 이조 때 들어와 받은 핍박이 얼마나 컸던가를 가늠할 수 있지요.』
유 옹은 세상도 변해 옛날 같은 성씨 박해도 없어졌지만 시구가 너무 많아 제 잘났다는 파벌싸움 없이 세상 어디 박혀있어도 한집안 한 식구 같은 화성받이 인정이 무엇보다 값진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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