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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들 "고전 번역 잘못…쉬쉬해서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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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고전 번역에 대한 '실명(實名) 비평'이 늘고 있다. 전공자들끼리 알고 쉬쉬하며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번역자 이름까지 공개하며 잘잘못을 따진다. 그리스.로마 신화와 플라톤.공자 등 동서양 고대 철학분야 번역을 놓고 전개되는 일종의 '관행 깨기'다.

◆ 번역과 편역의 경계는 어디

성균관대 영문과 이재호 명예교수는 오는 20일께 출간될 '문화의 오역(誤譯)'(동인출판사)에서 '이윤기의 그리스.로마 신화'(이윤기 지음)를 강한 톤으로 비판했다.

이 교수는 "이윤기씨는 상상력을 가미해 직접 쓴 저서라고 하지만 내용의 큰 줄기인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기본적 사실의 오역이 적지 않다. 특히 '길 잃은 태양마차'가 2003년에 '오비디우스 지음, 이윤기 옮김'으로 중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린 것을 보고 오역을 공개하기로 마음먹었다"고 밝혔다.

그는 "'길 잃은 태양마차'의 첫 1행에서 31행까지는 원문에 없는 내용이며, 저자인 오비디우스는 예수보다 39세 연상이고 예수가 존재하는지조차 모르는데 '예수 그리스도도 어린 시절에 이 도시(헬리오폴리스)에 잠깐 머물러 산 적이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고 역시 없는 얘기를 삽입했다"고 비판했다. 또 "'나는 제우스의 아들이다'고 해야 할 곳에 이집트 신을 끌어들여 '나는 오시리스의 아들이다'고 했고, 그리스 최고의 예언자인 케이레시아스는 '테바이 예언자'인데 '아테네 예언자'라고 하는 등 문화 오역이 많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이윤기씨는 "'길 잃은 태양마차'가 교과서에 실릴 때 '편역'이라고 했으면 이런 오해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교과서 편집자에게 그 점을 통보했다. 2005년판 교과서에는 '옮김'에 각주를 달아 '이 내용은 원전과 다르다'는 사실을 적었다"고 밝혔다.

◆ 오류 있지만 선구적 공로는 평가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관지인 '시대와 철학'(2005년 봄호)에서 김주일 박사는 '서양 고대철학 번역 현황과 문제점'이란 글을 통해 최민홍씨가 옮긴 '플라톤 전집'과 최현씨가 번역한 '소크라테스의 변명' '이상국가' '향연'등을 비판의 도마에 올렸다. 희랍어 원전의 영어.독일어.일본어 번역판을 다시 한국어로 중역 혹은 삼역하면서 생긴 오류들이 지적됐다. 김 박사는 "최민홍씨는 1973년 출간 때 '희랍어를 번역 대본으로 한 원전번역'이라고 했지만 기무라 다카타로의 '플라톤 전집'(1903년)을 대본으로 삼은 것이 확실하다. 자신이 모르는 것은 번역하지 않거나 눙쳐서 옮겼기 때문에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것은 플라톤의 철학적 깊이보다는 번역자의 한계"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그는 "70년대 척박한 한국의 고전 독서 상황에서 플라톤의 윤곽을 그나마 원형 비슷한 형태로나마 짐작할 수 있던 것은 최씨의 업적이다. 그의 번역이 나온 지 30년이 지난 지금도 플라톤의 원전 번역률이 40% 정도라는 점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평가했다. 오류는 있지만 선구적 공로는 인정하는 것이다.

최현씨 번역에 대해선 "꼼꼼히 따져 읽으면 오역과 앞뒤가 맞지 않는 문장이 많지만, 시집을 낸 문인이어서 그런지 신경 곤두세우지 않고 읽으면 술술 읽힌다. 값도 저렴하고 문장도 쉬운 점이 그의 번역을 지금도 찾게 하는 이유인 듯하다"며 "우리말의 자연스러움을 살리지 못하는 희랍어 원전 번역의 실태가 아쉽다"고 지적했다.

◆ 선호하는 '논어' 번역 제각각

동양 최고의 고전으로 꼽히는 '논어'는 사정이 어떨까. 최근 교수신문사가 전공 교수 3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시중에 유통되는 160여 종 가운데 동양고전연구회와 유교문화연구소 연구원들이 올해 각각 펴낸 '논어'와 김학주.이기동.김도련.황희경.배병삼.김형찬 등의 번역이 각기 3명 이상으로부터 "괜찮은 번역"이란 추천을 받았다. 성백효.박기봉.이우재.황갑연.윤재근.김종무.안병욱 등의 책도 한 명 이상으로부터 긍정적 평가를 받았다. 반면 정후수씨의 '주희가 집주한 논어'는 오역에 대해, 류종목씨의 '논어의 문법적 이해' 는 무리한 해석이라는 지적을 각각 받았다.

'광복 이후 최근까지의 유가철학 원전번역-논어를 중심으로'란 글을 '시대와 철학'(2005년 봄호)에 발표한 전호근 경기대 강사는 "추천자의 주관을 완전히 배제할 순 없다. 내가 볼 땐 1974년 이을호씨의 '한글 논어'가 돋보인다. 일상언어와 자연스러운 대화체를 사용해 생동감을 살렸으며, 권위의 굴레를 벗고 일상 속으로 다가오는 공자의 모습을 잘 그려냈다"고 말했다.

배영대 기자

*** 바로잡습니다

6월 15일자 21면 '이름까지 공개하며 칼날 비평' 제하의 기사에서 교수신문 설문조사를 인용해 보도한 '정후수씨의 '주희가 집주한 논어'와 류종목씨의 '논어의 문법적 이해' 등은 오역과 무리한 해석으로 비판받았다'는 대목 중 '오역'은 정씨의 책에만, '무리한 해석'은 류씨의 책에만 각각 해당되는 표현이므로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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