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제76화 ??맥인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미술인 열성자대회에 다녀와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 동양화과 제자인 김천배군이 찾아왔다.
『지금 충무로 가네보(종방)에서 화가들이 김일성·스탈린의 대형초상화를 그리고 있다』고 알려줬다. 그러면서 김군은『선생님도 그 작업에 참가해야 반동분자로 몰리지 않는다』고 초상화 그리기를 권했다.
그 때는 어디를 가나 증명이 있어야 했다. 식량도 없어서 순전히 배급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증명을 얻고 배급을 받기 위해선 화가는 이런 일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증명이나 식량도 문제지만 자칫 반동분자로 몰려 개죽음이라도 당할 것 같으면 당장 가족들이 문제여서 죽음에 약한 게 인간인지라 억지로라도 용기를 내야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현초(이유태)와 함께 초상화를 제작하고 있는 가네보에 가보았다. 광목을 통으로 몇 필씩 쌓아 놓고 사닥다리 위에 올라가 몇 백호 짜리 초상화를 그리고 있었다.
옆에다 자봉틀을 놓고는 광목을 잇대느라고 드르르 박아냈다. 작업장에는 이팔찬 정종여 이쾌대 최재덕 김만형등 모모한 화가가 화필을 들고 있었다.
나와 현초는 작업하는 데서 기웃거렸지만 누구 하나 반기는 사람이 없었다. 반기기는커녕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멋적어 뒤통수를 치고 되돌아 나왔다.
발붙일 곳조차 없구나 생각하니 망막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렇다고 월장할 수도 없고 속수무책으로 가만히 앉아있을 수만도 없는 노릇이어서 진퇴양난이었다.
그 때는 지하에 잠복해 있던 미술가동맹이 가네보자리에 간판을 걸고 공식적인 활동을 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화가들에게 배급도 주고 증명도 발급했다. 문밖만 나가려도「증명증명」하던 때여서 증명이라도 내볼까하고 사무실에 찾아갔다.
어두컴컴한 방에 큰 테이블을 놓고 책임자인 듯한 사람은 회전의자에 앉아있고 옆에는 비서인 듯한 아가씨 한사람이 조그마한 책상에 단정히 앉아있었다.
나는 이방에 들어가 촌사람처럼 두리번거렸다. 아가씨가『무슨 일로 왔느냐』고 물었다. 『증명을 내러왔다』니까 회전의자에 앉아있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며『선생님, 참 오래간만입니다』하고 반겼다.
얼른 보니 국대안 반대를 주동. 퇴학당한 예술대학 서양화과에 다니던 김진항군이었다. 그는 여비서에게『전에 우리 선생님이었다』면서 의자를 내놓으라고 명령했다. 나는 할말이 없어서『그래,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나』고 물었다.
김군은 서슴없이『감옥에 있다 나왔습니다』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들으니 등골이 오싹했다. 그래도 그는『어떻게 오셨느냐』며 깍듯이 존대했다.
더욱 좌부안석이었다.
『증명을 하러왔다』니까, 김군은 비서에게『우리 선생님 잘 좀 해드리라』고 일렀다.
나는 여비서가 내준 카드에 인적사항을 써서 제출하고는『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얼른 나와버렸다.
김군이『해 놓을 테니 일간 다시 나오시라』고 했지만 갈 수가 없었다.
그 무렵 북괴는 의용군을 붙드느라 혈안이 되어 있었다.
나이 젊은 사람들은 군인으로, 나이 좀 든 사람은 노무자로 데려갔다.
나는 노무자로 끌려갈까 봐 해방 후 서울에 올라와 잠깐 살던 삼선교근처 정동석씨 집에 피신해 있었다.
집집마다 가택수색을 하며 설치고 다녀 피하기조차 힘들었다. 그래 합법적으로 피하겠다고 생각, 밥도 안 먹고 이틀을 굶었더니 행색이 말이 아니었다.
그러고는 병원에 가서 진단서를 뗄 양으로 이곳저곳 헤맸지만 아는 의사라고는 찾을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삼선교 옆 적십자마크가 달린 병원에 들어갔다.
엄살을 하고 들어가 진찰대에 앉았더니 의사는『많이 상했다』며 청진기를 가슴에 대고 병력을 물었다.
『늑막염으로 죽다 살았다』고 했더니 의사는『폐가 나쁘다』면서 요양해야겠다고 했다.
그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진단서를 떼어달라고 해서 가지고 왔다.
집에 와 누워 있는데 반장이 찾아와서 이북으로 이사가라고 했다. 거기가면 집도 주고 양식도 주며 가구까지 거저 준다고 충동했다. 그러면서 내일 당장 떠나라고 윽박질렀다.
나는 진단서를 보이면서 가더라도 몸이 좀 회복되어야지 이대로 가다간 길에서 죽을 것 같다고 말미를 얻었다.
우리 앞집에 살던 박노인이 갖다주는 암호문(방송들은 내용)만 기다리고 있었다.
이 때 서울대 미술대학장직을 맡은 근원(김용준)이 찾아와서『어떻게 이런 지경이 되었느냐』고 위로, 약방문을 써주고 돌아갔다.<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