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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퀴즈] 남한산성 45일 항전 끝에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한 곳은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소년중앙과 함께 ‘소중 시간탐험대’를 진행하는 문화유산국민신탁(www.nationaltrustkorea.org, 02-752-9296·7)이 ‘청소년 역사 퀴즈 대회’를 11월 16일 오후 1~4시 서울 덕수궁 중명전에서 엽니다. 문화유산국민신탁은 시민의 힘으로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지키기 위해 설립된 단체입니다. 퀴즈 대회에는 조선 건국부터 일제강점기를 지나 광복을 맞이하기까지 굵직한 외세 침략 사건들을 중심으로 문제가 출제됩니다. 숱한 외침을 이겨낸 우리나라의 역사를 잘 알고, 어렵게 지켜온 문화유산을 잘 간직하고 보호하자는 취지에서입니다. 소중 독자들의 적극적인 참여 덕분에 참가 접수는 마감됐습니다. 예상 문제는 약속대로 싣습니다.

출제=문화유산국민신탁 손주희·송도영, 자료=『한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 『조선, 평화를 짝사랑 하다』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셀파 해법사회』

배경 학습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두 차례 왜란 이후 명나라는 급속도로 약화되었다. 7년간 조선에 파병하고 군량 공급비를 투입한데다 황실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해 궁궐을 건축하느라 국가재정이 파산 지경에 이르렀다. 이 기회를 틈타 성장한 여진족의 수장 누르하치는 후금을 세웠다.

후금이 군사 요충지를 함락시키자 명은 조선에 파병을 요청한다. 선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 외교정책을 펼쳤다. 군대를 보내되 국경에 집결시켜 명에게는 조선이 우호적이라는 인식을 갖게 하고, 후금에 대해서는 조선이 적대국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시키려 한 것이다.

그러나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실권을 잡은 서인들은 광해군의 중립 외교정책을 폐기하고 명나라와의 관계만을 유지하는 친명배금(명과 친하게 지내고 후금을 배척한다) 정책을 택한다.

후금은 이에 1627년 기병 3만5천여 명을 보내 조선을 침략한다. 조선은 아직 군사력이 제대로 복구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며칠 되지 않아 방어진이 무너지자 세자는 전주로,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했다. 후금은 침략하면서부터 화해를 요청하였으나 조선은 한성이 점령된 후 14일 뒤에야 이를 받아들였다. 이것이 정묘호란이다.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가 후금(청)을 적대하다 굴욕적 항복을 하고서 청 태종의 요구로 서울 송파구에 세운 삼전도비.

후금과의 화해는 성사됐으나 조선은 애초에 약속을 지킬 의사가 없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후금은 나라 이름을 청으로 고치고 다시 한 번 조선을 침략할 계획을 세운다.

1636년 12월 청의 두 번째 왕 태종은 직접 본대를 지휘하며 조선에 쳐들어와 닷새 만에 평양을 통과한다. 다급해진 조선 조정은 종묘의 신주와 왕실 가족을 우선 강화도로 피신시킨다. 뒤따라 강화도로 들어가려던 인조는 청이 한성~강화도 간 길목을 막고 있다는 소식에 다시 성안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조선군은 도성을 방어할 능력이 없었고, 다급해진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도망쳤다.

청군은 45일 동안 남한산성을 포위했다. 성내의 사정은 극도로 악화돼 식량은 다 떨어지고, 병들고 죽는 사람이 늘어났다. 각 도에서 보낸 지원병 또한 도착하기도 전에 무너졌으며, 적의 포위망을 뚫기 위해 펼친 기습작전도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게다가 강화도에 상륙한 청군은 강화성 성벽을 헐고 진입한다. 인조의 둘째 아들 봉림대군(훗날 효종)은 살육과 약탈 중지, 왕실 가족의 신변보장을 조건으로 항복한다. 그리하여 청군은 왕실가족 200여 명을 이끌고 강화도를 출발해 삼전도(지금의 서울 삼전동에 있었던 나루터)로 향했다.

청나라 군대는 강화도 함락 소식을 전하고, 남한산성 가까이에 대포를 쏘며 인조에게도 항복을 요구했다. 1637년 인조는 세자와 대신, 호위군 500여 명을 거느리고 남한산성 서문을 나서 삼전도로 향했다. 죄 있는 자가 정문으로 나올 수 없으니 서문으로 나오는 것이 옳다는 청의 주장에 따른 것이었다. 인조는 말에서 내려 청 태종이 앉아 있는 단상을 향해 삼배구고두(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다)의 예를 갖춰 굴욕적 항복 의식을 치른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은 이렇게 2차례에 걸친 여진족의 침입에 맞서 싸우다 끝내 국왕이 적장 앞에 엎드려 항복하게 된 치욕적인 사건이다.

이후 조선은 명나라 연호를 폐지하고 청나라의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명과의 국교는 단절하고, 청에 신하국으로서 충성을 표했다. 세자와 왕자 및 대신들의 자제도 청나라 심양에 인질로 보냈다. 청나라가 전쟁을 할 때는 지원병을 보내고, 매년 정기적으로 사신을 파견하며 조공을 바치게 됐다. 이와 같은 관계는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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