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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 타도” 외친 국민당, 레닌 스타일 따라 당 건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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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7호 29면

소련에서 귀국한 장제스(왼쪽 둘째)는 쑨원(왼쪽 셋째)과 한 차례 기싸움을 치른 후 황푸군관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1924년 6월 16일 황푸군관학교 입학식. [사진 김명호]

1988년 1월, 장징궈(蔣經國·장경국)가 타이베이에서 세상을 떠났다. 장제스(蔣介石·장개석)와 장징궈, 양대에 걸친 철권통치 시대가 막을 내렸다. 국민당은 신임 총통 리덩후이(李登輝·이등휘)를 당 주석에 선출했다. 한 정치평론가의 글이 눈길을 끌었다. “그간 중국국민당은 레닌의 당 건설 사상을 모델로 삼았다. 장징궈의 사망과 리덩후이의 출현은 레닌식 운영의 철저한 파기를 의미한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96>

수십 년간 “공산당 타도”를 외치던 국민당이 레닌식 정당이었다는 말에 사람들은 경악했다. 60여 년간 쌓인, 역사의 미세한 먼지를 걷어내자 윤곽이 드러났다.

1921년 5월, 광저우(廣州)에서 비상대총통(非常大總統)에 취임한 쑨원(孫文·손문)의 꿈은 오로지 북벌(北伐)이었다. 코민테른 대표 마린이 국·공이 연합해 북벌을 하자고 제안했지만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미적거리기는 공산당도 마찬가지였다. 마린이 중국을 떠나자 국·공 연합은 무산되는 듯했다.

쑨원도 사람이었다. 된통 얻어맞고 나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22년 6월, 쑨원의 지지자였던 광둥 군벌 천중밍(陳炯明·진형명)의 군대가 쑨원의 거처를 공격했다. 구사일생, 광저우를 탈출한 쑨원은 망망대해를 떠돌았다. 급전을 받고 달려온 장제스의 도움으로 상하이에 겨우 안착했다.

황푸군관학교는 국공합작의 산실이었다. 프랑스 파리에서 소년공산당을 창당한 저우언라이도 정치부 주임으로 장제스를 보좌했다. 황푸 시절 국민당 군복을 착용한 저우언라이.

절망에 빠진 쑨원은 공산당에 손을 내밀었다. 비슷한 처지의 중공도 노(老)혁명가의 손길을 뿌리치지 않았다. 합작과 혁명군 양성에 머리를 맞댔다. 소련에도 “사람을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다. 레닌의 특사 요페(Joffe)가 마린을 대동하고 광저우에 나타났다.

볼셰비크 후보 중앙위원과 베를린 주재 대표를 역임한 요페는 한때 레닌의 전권대표 자격으로 베이징의 북양정부와 담판을 벌인 적이 있었다. 외교관계 수립이 목적이었지만 북양정부는 외몽고에 주둔 중인 소련군 철수부터 요구했다.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하던 우페이푸(吳佩孚·오패부)에게 접근했을 때도 반응은 비슷했다. 요페의 보고를 받은 레닌은 우페이푸를 포기하지 않았다.

광저우에서 쑨원을 만난 요페는 중국 공산당에는 관심이 없었다. 소련의 입장을 설명하며 우페이푸를 거론했다. “소련은 중국을 침략할 의도가 없다. 외교관계가 회복되기를 바랄 뿐”이라며 군사력을 갖춘 우페이푸와의 연합을 권했다. “중앙정부의 대권을 장악하면 우페이푸를 고위직에 임명하기 바란다.” 군사원조를 조건으로 중국에 공산주의를 선전해 줄 것도 요구했다. 쑨원은 “공산주의와 소비에트 제도는 중국에 적합하지 않다”며 지지한다는 발언조차 하지 않았다. 레닌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요페는 국민당과 중공의 연합을 추진하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었다.

쑨원과 랴오중카이(廖仲愷·요중개)는 요페에게 혁명군 양성을 위한 소련의 지원을 끈질기게 요구했다. 랴오중카이의 아들인 전 중공 부주석 랴오청즈(廖承志·요승지)의 회고를 소개한다.

“상하이에서 광저우의 대원수부(大元帥府)로 돌아갈 날을 고대하던 쑨원의 사상에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당에 충성스러운 군대가 없는 한 혁명은 성공할 수 없다며 소련 홍군의 건군 경험을 모방한 군관학교 설립을 결심했다.”

요페는 쑨원과 공동전선을 발표했다. 골자는 군관학교 설립이었다. 그해 겨울, 쑨원은 중공당원들의 국민당 입당을 수락했다. 국민당과 소련이 정식으로 연맹을 결성하자 중공도 “공산당원이 개인 신분으로 국민당에 입당하는 것을 허락한다”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소련은 군사 전문가와 정치공작 전문가를 대거 광저우로 파견했다. 소련 군사학교의 경험을 익히기 위해 시찰단을 파견하고 싶다는 쑨원의 요청도 받아들였다. 쑨원은 “가장 능력 있는 사람을 모스크바로 보내겠다. 소련의 정치와 당 업무, 군사시설을 둘러보고, 소련 홍군의 경험을 토대로 건군에 착수하겠다”는 답신을 보냈다.

쑨원은 젊은 사람 중에서 시찰단 후보자를 물색했다. 시종일관 자신의 친(親)소련 정책에 반대하던 30대 초반의 장제스가 떠올랐다. 쑨원의 속을 알 리가 없던 장제스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쑨원에게 “10월 혁명에 성공한 소련을 둘러보고 싶다”는 편지를 보냈다. 정중한 협박도 잊지 않았다. “저의 소련행을 허락하시지 않는다면 스스로 갈 길을 찾겠습니다.” 쑨원은 장제스에게 시찰단 단장의 중임을 맡겼다.

장제스의 3개월에 걸친 모스크바 체류기간은 국·공 연합의 옥동자 황푸군관학교의 잉태기였다. 비서와 두 명의 공산당원을 대동하고 모스크바에 도착한 장제스는 환대를 받았다. 암으로 죽을 날만 기다리던 레닌은 만나지 못했지만,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주석 지노비예프와 함께 회의를 주재하고, 소련 홍군의 아버지 트로츠키로부터 무기와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확답을 받아냈다. 러시아 혁명의 성공 원인을 분석한 일기도 남겼다.

“세 가지가 러시아 혁명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첫째, 노동자가 혁명가들의 선동을 받아들였다. 둘째, 농민들이 동요하지 않았다. 셋째, 각 민족의 자치와 연방제를 수용했다.” 특이한 점도 일기에 남겼다. “아동교육이 엄격하고, 노동자들이 군대교육을 받아들인다. 국가가 작은 공장을 개인에게 임대해 주는 것도 특이했다.”

장제스는 모스크바에 와 있던 외국 혁명가들과도 친분을 쌓았다. 월남의 호찌민(胡志明)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았다. 지노비예프의 소개로 중공 창당을 도왔던 보이딘스키와도 다섯 번 만났다. 보이딘스키는 공산당 입당을 권했다. 장제스는 “내가 온 목적은 군관학교 설립을 위한 것 외에는 없다”며 거절했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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