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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년 체제' 환골탈태할 때…대등 관계에서 통일협력 끌어내야

중앙일보

입력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총무상 등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 내각의 각료 3명이 18일 태평양전쟁 A급 전범들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를 전격 참배했다. 8일 아베 총리가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한국과) 정상회담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며 러브콜을 보낸지 열흘만이다. 추파와 망동을 반복하는 일본의 갈짓자 외교로 인해 8.15 이후 모처럼 전향적인 대일 제스처를 취해온 정부는 또다시 난처한 입장에 처했다.

도무지 가까이 하기 힘들지만, 헤어질 수도 없는 대일관계를 어떻게 풀어가야 하나. 외교부에서 동북아국장을 지낸 일본 전문가 조세영 동서대 특임교수(사진)가 그런 의문에 답하는 책을 냈다. 『한일관계 50년, 갈등과 협력의 발자취』란 제목에서 보듯 저자는 두 나라가 장기간 밝음(明)과 어둠(暗)을 함께 지고 갈 수 밖에 없는 아주 특이한 사이라고 규정한다. 과거사 같은 어둠을 단기간에 해결할 길은 없기에 안보·경제 같은 밝음을 추구하되, 어둠(과거사)에 대한 문제 제기를 끈질기게 이어가는 '분리 대응'이 필요하다는 제언이다.

박근혜 정부가 금년 하반기 들어 대일 유화노선으로 돌아선 건 남북대화 진전을 염두에 둔 것이란 관측이 많다. 집권 3년차이자 분단 70주년인 내년에 남북 정상회담 같은 가시적 성과를 원하는 정부로선 남북 밀착에 대한 미국의 우려를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대일 관계를 개선해둘 필요가 크다는 분석이다. 여권 고위 관계자도 "남북대화 일정을 감안하면 연말 안에 한일 정상회담이 성사돼야 한다는 게 정부 판단"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중국의 부상에 대응해 미국과 손잡고 우경화를 가속화하는 일본에 대해 정권 차원의 공학적 계산으로 대응하는 건 명백한 한계가 있다는 게 조 교수의 지적이다. 대신 내년 50주년을 맞는 '65년 체제'를 양국의 변화된 국력과 주변 정세에 맞게 개편하고, 통일에 대비한 한·일 협력을 구조화하는 게 급선무라고 그는 강조한다. 변화된 현실을 외면하고 냉전시절 구축된 한일관계 틀을 고집한다면 양국은 큰 위기를 맞을 수 있다는 것이다.

-대일 외교를 담당했던 전문가 입장에서 한일 수교 50년사를 서술했다. 그 핵심은 뭔가.

"한일 국교가 정상화된 '65년 체제'는 일제 식민 35년보다 15년이나 길다. 이 체제를 지탱해온 두 개의 기둥이 경제와 안보다. 1965년 당시 최빈국이었던 우리는 대통령이 해외에서 1000만 달러를 끌어온 게 뉴스가 될 정도였다. 그만큼 외자가 절실했다. 이런 한국에 돈을 빌려줄 나라는 이미 선진국 반열에 오른 일본뿐이었다. 결국 65년 수교를 통해 일본에게서 확보한 5억달러(유상 2억, 무상 3억)로 한국은 경제성장의 종잣돈을 만들었다. 이게 65년 체제의 핵심인 경제 기둥이다. 두번째는 안보 기둥인데, 65년은 베트남전이 본격화된 냉전의 절정기다. 반공 진영의 결속이 중요했다. 그런데 일본은 안보를 미국에 맡기고 경제에 올인했다. 국방비가 GNP의 1%도 안됐다. 그래서 한국은 '일본이 안보에 더 많은 기여를 해야 한다'며 한국을 지원하라고 주장했다. 지금과는 정반대 상황인 셈이다."

-일본은 어떻게 나왔나.

"한국의 요구를 적당히 들어주는 척하면서도 북한과도 대화하는 등거리 외교를 했다. 대표적인 게 74년 재일교포 문세광의 육영수 여사 저격 사건이다. 문세광은 조총련과 연루된 인물로, 일본 파출소에서 훔친 권총을 범행에 이용했다. 일본은 처음엔 책임을 부인하다가, 한국이 강하게 반발하니 '도의적 책임을 느낀다'고 돌아섰고 이후 한국을 지원하기에 이른다. 일본 우파들이 한국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반공으로 한일이 연결되면서 65년 체제는 반공 연대에 기반한 안보 기둥으로 유지돼 왔다."

-지금 두 기둥의 상태는 어떤가.

"우선 한일간에 국력 차이가 좁아지며 경제기둥이 크게 약해졌다. 한국은 80년대까지는 일본에 경협자금으로 40억달러를 요구했을 만큼 외자사정이 좋지 않았지만 86~88년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을 거치면서 90년대 부터는 일본에 손 벌릴 이유가 없어졌다. 안보 기둥도 변질됐다. 중국이 한국과 밀접해지면서 미국·일본과의 군사협력에 알레르기를 보이게된 거다. 65년 체제가 기로에 선 거다. 65년 체제가 한일관계 버전 1.0 이라면 버전 2.0이 필요한 시점이다."

-버전 2.0은 어떤 것이어야 하나.

"안보는 냉전시절의 한미일 협력 틀을 고집했다간 한일, 한미관계를 해치게 된다. 일본과 보다 대등한 협력구도를 만들어야 한다. 경제도 양국 기업들이 대등하게 협력하는 관계로 바꿔야 하고, 한일 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해야 한다. 여기에 통일을 또 하나의 기둥으로 추가해야 한다. 통일과 관련해 일본의 협력을 어떻게 확보하느냐가 관건이다. 이렇게 2.0이 확보되면 한일관계는 다시 끈끈하게 묶어질 것이다."

-2012년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다 철회한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은 당시 실무를 맡았던 사람으로서 어떻게 보나.

"안보기둥이 바뀌어도 한국의 안보 기축은 여전히 한미동맹이다. 이 동맹의 토대는 일본에 있는 유엔 산하 후방기지 7개다. 한·미·일 안보의 틀 속에 우리 안보의 토대가 존재하는 셈이다. 따라서 합리적 범위에서 일본과 협력할 필요가 있다. 일본과 협정을 체결해도 정보는 선별적으로 주고받을 수 있다. 게다가 한국은 적성국가였던 러시아와도 정보협정을 맺고 있다. 일본은 위성, 우리는 휴민트(인간정보)가 비교 우위니 정보교류를 하면 시너지 효과가 난다. 83년 소련 전투기가 대한항공 007기를 요격했을 때 소련기의 교신내용을 가장 먼저 감청한 게 일본 자위대다."

-한미일 안보협력이 여전히 필요하다는 얘긴데 중국의 반발은 어떻게 해야 하나.

"미국이 주도하는 미사일 방어시스템(MD)을 예로 들어보자. MD는 한·미·일이 함께 움직여야 완벽하게 작동하는 구조다. 중국은 물론 러시아도 반발한다. 따라서 한국이 MD에 편입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MD에 들어가지 않으면서도 한미, 한미일을 기축으로 한 안보구조를 유지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예를 들면 한미일 합동훈련은 계속하는 거다."

-한일관계에 통일 기둥을 추가하라는 건 무슨 얘긴가.

"90년 독일이 통일할 때 독일과 프랑스 정상은 거의 매일 전화 통화를 했다. 우리도 통일을 위해서는 일본 등 주변 열강과 긴밀하게 소통하고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게 통일 기둥이다. 어느 나라도 적으로 만들어선 안된다."

-과거사 문제에 진전이 없는데 일본과 통일을 놓고 대화할 수 있을까.

"일본에겐 지적할 건 지적하고 협력할 건 협력하는 '분리 대응'이 불가피하다. 우리 대통령에게 대일 관계는 늘 포퓰리즘과 영합하고픈 유혹의 대상이다. 그럼에도 냉정하고 실용적인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65년 6월22일 한일 수교 협정이 타결되자,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특별 담화를 낸다. '어제의 원수라도 오늘과 내일을 위해 필요하다면 손을 잡는 게 현명한 대처'라며 국민의 이해와 협조를 호소했다. 이런 자세가 정말 필요하다. 특히 SNS가 발달한 요즘은 지도자가 상황을 솔직히 설명하고 국민의 이해를 얻지 못하면 어떤 외교정책도 성공할 수 없다."

-현재 한일관계가 수교 이래 최악이란 얘기가 있다.

"아니다. 40년 전이 최악이었다. 74년 문세광의 육 여사 저격에 격앙된 서울의 시위대가 일본 대사관에 난입해 일장기에 불을 질렀다. 도쿄에서도 전례 없는 혐한 분위기 속에 우리 대사관원들이 단교에 대비해 철수 준비에 들어갔다. 그때 미국이 한·일에 '관계를 수습하라'는 희망을 전달하면서 위기를 가까스로 넘겼다."

-미국은 한일관계의 균형자 역할을 해온 게 사실이다. 그 미국이 '이젠 일본과 화해하라'고 압박하는데.

"아무리 그래도 우리가 위안부나 독도 문제를 덮고 갈 수 있나. 결국 분리 대응이 답이다. 미국의 우려를 어느 정도 해소시켜 주면서, 우리 국익에도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분리대응은 단순히 '정경분리' 차원이 아니다. 대화를 하면서도 껄끄러운 문제를 계속 제기하는 게 분리대응이다. 이는 미국도 마찬가지다. 위안부나 야스쿠니 참배 문제엔 그들도 단호하지 않나. 그러면서도 미국은 올초 헤이그에서 한·미·일 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 이런 게 분리대응이다."

-한일 정상회담은 어떻게 해야 하나.

"양국간 입장차가 커 정상들이 만나 얼굴을 붉힐 것 같으면 안 하는 게 낫다. 2011년 교토 한일 정상회담이 그랬다. 내가 담당 국장이었는데 실무 조율이 미처 안된데다 회담 직전 서울의 일본 대사관 앞에서 열려온 수요 집회가 1000회를 맞아 여론의 압박이 가중됐다. 결국 한·일 정상이 얼굴만 붉히다 헤어졌다. 그게 지금까지 이어지고있다. 이런 재앙을 피하려면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총리는 서로 입장차가 좁혀진뒤 만나는 게 맞다. 하지만 외교장관 회담은 빨리 열어 분리대응 트랙을 가동해야 한다. 장관끼리는 얼굴을 붉혀도 된다."

-일본은 앞으로 어떻게 나갈까.

"일본의 관심은 온통 동북아의 힘의 균형 변화에 쏠려 있다. 따라서 보통국가화를 끊임없이 추진할 것이다. 그 결과 지역에 불안정을 고조시킬 우려가 크다. 이를 막으려면 한·중·일 3자 협의 시스템이 활발히 가동돼야 한다. 한국이 주도해야 한다. 외교의 창의력이 필요하다."

-40년 전엔 한국 시위대가 일본 대사관에 난입했다. 지금은 한일관계가 악화돼도 그런 일은 없다. 양국간 펀더멘탈이 강해진 건가.

"그렇다고 본다. 일본 정치인의 망언을 규탄하는 집회를 한뒤 일식을 먹고, 일제차로 귀가한다. 커진 국력에 따른 여유의 표현일 수 있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98년까지는 한국보다 중국에 친근감을 느꼈지만 그뒤론 반대로 돌아선다. 한일 국민간의 상호 인식이 급진전한 거다. 독도나 위안부 문제는 쉽게 해결될 수 없겠지만 시민 수준에서 축적된 양국관계의 저변은 큰 힘이 될 것이다."

-외교부에서 일본통으로 근무하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98년 김대중 대통령과 아키히토(明仁) 일왕이 만났을 때 내가 통역을 맡았다. 일왕이 '도라지' 같은 말을 한국어로 표현하며 친근감을 표시하다 돌연 '(초대 천황인) 진무 천황의 생모가 백제 출신이라 한국에 각별한 인연을 느낀다'고 말했다. 전율을 느꼈다. 순혈을 강조하는 일본 왕가에서 이런 말이 나오기란 극히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 발언은 당시 공개할 수 없었고, 보도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몇 년 뒤 일왕이 공개석상에서 이 얘기를 직접 해 세상에 알려졌다. 98년 당시 일왕의 그 발언은 엄청나게 파격적인 것이었다."

-그밖에 기억나는 비화는.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총리의 정상회담에서도 통역을 했다. 회담이 끝난 뒤 차를 타고 가면서 DJ가 나를 앞자리에 태워줬다. 차 안에서 '통역을 잘했는데, 어휘는 조금 더 늘려야겠다. 일본 소설을 많이 읽으면 좋다'고 조언해 주더라. 김영삼 전 대통령이 민자당 최고위원 시절 소련을 방문했을 때도 일본 기자들과의 회견에서 내가 통역을 맡았다. YS가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이라 언급하는 걸 '소련'이라 줄여 통역했더니 YS가 '다시 하라'고 지시해 풀네임으로 통역했다. 두 사람 다 일본어 세대라 나보다 훨씬 일본어를 잘했던 것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본 총리는.

"오부치 총리다. 격의 없고 따뜻한 인품의 지도자였다. DJ와 회담이 끝나자 한국 측 통역인 나에게도 '늘 수고가 많습니다'며 인사를 건네더라. '이쓰모(늘)'란 말이 특히 기억에 남았다."

강찬호 기자 stoncold@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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