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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20)-화맥인맥(제76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미술대 교사시비>
49년1월4일 백농 최규동 박사가 서울대 제4대 총장에 취임, 교사를 재 배정했다.
대학본보의 이 같은 조처로 미술대학은 법과대학이 쓰던 건물로, 옮기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법대가 건물을 비워주지 않고 버텼다.
언제까지 법대의 처분만 기다릴 수도 없는 일이어서 우선 밀고 들어가 곁방살이를 했다. 그러면서 법대 쪽에 건물을 비워달라고 독촉했지만 그들은 막무가내였다. 하는 수 없어 장 발 학장을 앞세우고 법대에 담판하러 갔다.
우리 쪽에서는 교무과장 박갑성 씨와 학생과장 직무를 맡았던 내가 배석했다.
법대 쪽은 이의근 학장, 한태연 교무과장, 김기두 학생과장이 자리를 함께 했다.
깐깐한 우석(장 발)이『공문 받았지요.』하고 먼저 포문을 열었다.
하성(이의근)은『받기야 받았지요』하고 떫은 표정을 지었다.
우석이『대체 이런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하고 다그치자, 한태연씨가 불쑥 나서서『그런대로 쓰는 거지 뭘 그러느냐』고 얼버무렸다.
아무리 해도 방은 비워줄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우리들은 자리를 뜨면서 모든 것은 본부의 지시에 따라야 할게 아니냐고 엄포를 놓았지만 법대 쪽은 우이독경이었다.
법대의 고집 때문에 안방을 차지할 미술대학이 더부살이 밖에 할 수 없었다.
이렇게 차일피일 하다가6·25사변을 당해 교사타령은 할 수도 없게 되었다.
예술대학이 생기면서 첫 번째 뽑은 동양화과 학생중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산정(서세옥)과 남정(박노수)이 그림솜씨를 보였다.
남정은 동숭동의 낙산 판잣집에서 방한 칸을 빌어 자취를 하고 있었다.
학교에서도 저녁 늦게까지 그림을 그리고 공부도 열심히 했다.
참 얌전한 학생이었는데 아무 연락도 없이 며칠동안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이상해서 다른 학생에게『박군이 왜 학교에 안나오느냐』고 물었다.
그 학생 대답이 아파서 못나온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학생을 앞세우고 그날 방과후에 남정의 자취방에 가보았다.
그는 끙끙 앓고 있었다. 위가 나빠 먹는 게 소화되지 않아서 대꼬챙이처럼 바짝 말라 있었다.
게다가 병 간호해 줄 사람도 없어서 안스럽기까지 했다.
나는『병이 나면 약을 먹어야지 가만히 누워있기만 하면 낫는냐』면서 남정을 일으켜 세웠다.
마침 혜화국민학교 앞에 내가 잘 아는 윤길영 한약방이 있어서 거기 데리고 가 진맥을 하고 약 몇 첩을 지어 줬다.
약을 잘 달여 먹고 빨리 회복해서 학교에 나오라고 당부하고는 헤어졌다.
나는 미술대학 초기에 학생과장을 맡고 있어서 곧 잘 수학여행에도 따라 다녀야 했다. 한번은 미학과 학생들이 경주로 여행을 가는데 박의현 과장이 나에게 동행을 요청해 함께 갔다.
박의현씨는 경성제대 미학과 출신인데 술을 좋아해 내가 학생과장이기도 하지만 술친구로서 나를 택했던 것 같다. 경주여행 중에는 박씨를 제쳐놓고 내가 인솔자 노릇을 해야했다.
학생들에게 석굴암이며 석가탑·다보탑 등에 관한 설명을 해야하는데 박과장이 이 일을 내게 떠맡겨서 불시에 여행안내자가 되었다.
내가 소속돼 있던 회화과 학생들과는 해인사에 가서 스케치도 하고 신 동양화로도 폈다.
미술학부는 식구가 단출해 교수나 학생이 한집 식구처럼 지냈다.
과가 달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금새 사발통문이 돌곤 했다. 그때만 해도 모델 구하기가 어려운 때였는데 한번은 조각과에서 멋진 모델을 구해왔다고 학교 안이 술렁거렸다.
교수들이 얼마나 멋진 모델인데 이렇게 요란스러운가 싶어 조각과 교실까지 가보았다. 과연 놀랄 만큼 좋은 모델이었다.
잘 생기고 몸도 좋았다. 아무리 보아도 학생들 앞에 알몸으로 설 여성이 아닌 것 같아 물어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조각과 학생의 친구였다.
그 학생이 얼마나 입에 침이 마르도록 삶아댔는지 부잣집 딸이 모델로 온 것이다.
살빛도 희고 몸이 균형이 잘 잡혀 있어 다른 과에서도 눈독을 들였지만 그 모델은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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