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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직업에 애착이 없는 사회는 불안정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최근 대한상의에서 조사한 우리 나라 상인들의 의식구조를 보고 기업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한편으로 섭섭하고 한편으로 걱정스러운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우리 나라 상인들은『직업에 대한 불만도 있지만 특히 자식에겐 장사를 시키고싶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사조는 개인을 위해서도 그렇지만 국가를 위해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자기직업에 대한 애착심과 전통의 계승이 줄기차게 이어져야 사회도 안정되고 국가도 발전하는 것이다.
우리 나라 상인들의 의식구조가 왜 이렇게 되었는가를 곰곰 생각해본다. 그것은 우선 변란과 변화가 너무 많아 사회가 안정되지 못한 것이 배경을 이루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회가 안정되지 못하니 신분의 변화가 빨랐고 또 관권의 세도가 심해 관존민비의 사조가 팽배했다.
따라서 자식은 사농공상의 제일 하급직업인 상인을 만들지 않고 정치가나 관리등 사를 만들려고 들 기를 썼다.
또 상인 (기업가포함) 들이 납세에 대한 의식이 부족하기도하지만 세금자체가 너무 가혹한데다 세무공무원의 업무처리에 많은 불만을 갖게된데도 원인이 있다고 본다.
편한 직업이 따로 없겠지만 기업가는 1년 내내 하루도 편한 날 없이 늘 노심초사하는 고통을 겪으며 이런 고통을 후손에 물려주지 않겠다는 뜻이라 본다.
유럽이나 일본에 가보면 조그마한 식당이나 과자집 하나가2백∼3백년 5∼10대 전승되어온 상점이 많다.
한 예로 일본 동경에 있는「도라야」라는 양갱(밤이나 기타 전분을 사탕에 버무려 만든 과자)을 만드는 과자집이 3백년을 이어 내려오고 있다.
그야말로 가업의 전승이다. 3백년을 이어 내려오니 일본 제일의 양갱 집이 됐고 지금은 큰돈을 모아 재벌이 됐으나 다른 방면으로 사업을 확장하지 않고 오직 양갱 한 종류만 만들고 있다.
자기직업을 존중하고 전심전력, 한가지에 온 정성을 다 바치니 크게 성공할 수 있었다.
10대조가 익힌 기술이 몇 백년을 거쳐 내려와 할아버지의 기술을 아버지가, 그 아들이 또 아버지의 기술을 전수하여 가는 것이다. 이른바 기술의 축적이다.
할아버지·아버지가 경영하는 업소에서 원료를 배합하는 것부터 손님 접대하는 방법, 분위기 등을 자연스럽게 몸으로 익혀온 것이다. 노하우를 자연스럽게 전수 받는 셈이다.
살아있는 교육을 통해 자손을 키우고 음식점이건 튀김 집이건 그 분야에서는 제1인자가 되겠다는 직업을 평생을 통해 불태우며 자랑스럽게 가업을 계승하는 것이다.
사회각층에서 이런 정신과 자세가 이어지면서 오늘의 일본식직업윤리가 꽃피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해본다.
세계적 불황 속에서 각국이 기진맥진할 때도 일본만이 유독 경쟁력을 잃지 않는 저력은 바로 직업에 대한 긍지와 전통의 계승이라는 역사의 뒷받침이 있었다고 본다.
싸고 좋은 물건은 자부심에서 우러나는 정성이 담겨 있는 것이다. 샘플조사로 전체의 품질여부를 가리는 구미기업과 하나하나의 물품을 일일이 체크하는 일본과의 경쟁결과는 너무도 뻔한 것이다.
사회가 안정돼있지 않고 질서가 크게 흔들리는 사회에서는 벼락부자나 벼락출세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벼락출세가 많은 나라에서는 자기직업에 대한 긍지도, 가업의 계승도 쉽지 않다.
한탕주의의 사조가 팽배해 가는 것이다.
이발소를 하건 설렁탕 집을 하건 앞을 내다보고 근면과 신의로 번영을 향해 착실히 전진하기보다는 당대에 기적을 이루고 눈앞의 이익에 급급하는 사회에는 축적이 있을 수 없다. 우리도 5천년의 역사를 통해 세계에 자랑스럽게 내 놓을만한 것들이 많았다.
고려청자의 신비한 빛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쉽게 찾을 수 없는 훌륭한 것이지만 오늘날에는 그 기술이 끊어져 버렸다.
아무리 훌륭한 것이 있다하더라도 그 비법을 전승시키지 못하는 풍토라면 민족적 기술이란 형성될 수 없는 것이다.
직업관이 뚜렷해야 민족적 기술을 이어 나갈 수 있다.
삼국지에 보면 화타라는 신의가 있다. 그가 조조의 노여움으로 죽음을 당하기 직전 자기감옥을 지키는 옥졸에게『죽는 것은 원통하지 않으나 내 의술을 소상히 적은 청낭서(청낭서)를 세상에 전하지 못하는 것이 한』이라며 그 옥졸에게 청낭서를 세상에 전해달라는 유언을 하는 장면이 새삼 생각난다.
청자의 제조기술을 적은 책만이라도 남겼다면….
모름지기 어떤 직업에든 자기직업에 대한 긍지를 갖고 이를 계승발전시켜 나가는 민족이라야만 장래가 밝을 것이다.
김용주
▲서울출신(77세)▲부산 제2공립상업학교졸 ▲대한해운공사 사장 ▲주일특명전권공사▲참의원의원 ▲전남방직·신한제분 회장 ▲대한방직협회 회장 ▲전경련부회장 ▲전방주식회사회장 ▲한국생산성본부 명예회장 ▲한국경영자협회 회장 ▲전경련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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