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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혁명전야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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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육사8기 중심의 거사준비는 박정희 소장도 참가한 2차 회합으로 본궤도에 오른다. 이로부터 이듬해 5·16까지의 6개월 동안 고비를 겪기는 하지만 이상할 이 만큼 순탄했다. 육사출신기별의 별도 모임 등 몇 갈래 그룹을 손쉽게 통합한 것, 장기간의 비밀유지, 몇 차례의 정보 누설에도 관련 장교중의 단 한사람도 조사 받지 않은 것, 그리고 박 장군의 활동이 주목받지 않은 것 등….당사자들도 못밖에 운이 좋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결정적인 것은 장도영 참모총장의 태도다.
장 총장은 결코 동참자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묵인에서 협조, 만류에서 진압, 그리고 끝내는 동참으로 태도를 바꾸어간다. 그런 장 총장의 곡예는 5·16 비사 속의 최대의 미스터리다. 이제 거사준비과정을 이런 증언을 통해 살펴보자.
5·16주체는 박정희 소장을 중심으로 한「점의 조직」이다. 극히 제한된 몇 사람 외에는 조직의 규모나 윤곽을 몰랐다. 많은 사람들은 그 무렵의 군부내 분위기 때문에 거군적인 것으로 알았던 사람도 있다. 그러나 역시 주축은 부대의 출동을 지휘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5기와 정군의 선두그룹 8기들이었다.

<육사교관이 인연>

<거사준비는 육사5기와 8기로 구분해서 볼 수 있다. 5기 출신들은 주로 출동부대의 책임을 맡았으며 8기 연락을 비롯한 일종의 독전대 역할을 맡았다. 5기생과 박 장군과의 관계는 육군사관학교 시절 장군이 육사교관이었던 것이 인연이 되어 가깝게 지냈다.
8기생은 박 장군이 육본정보실장을 맡고 있을 때 8기 졸업생 중 우등생 30명을 모두 정보국으로 배치해 상황장교로 근무케 한데서 특별한 관계가 이루어졌다.>
5·16당일 ×관구 사령부 참모장으로 서울근교 육군부대의 지휘를 맡았던 김재춘씨는 거점의 조직이지만 그 주류는 이런 인맥에서 형성되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부연설명으로 이렇게 증언한다.
『거사준비라는 것이 무슨「회」나「단체」를 구성하듯이 모여서 이루어 질 수는 없거든. 우리들 5기는 박 소장과 개별 접촉이었어요. 5기들은 각 사령부나 단위부대의 직책도 직책이어서 전체적인 모임을 가진 일은 한번도 없어요. 모두 개별적으로 박 소장과 직결되어 있었지요. 내가 그랬고 공수단장 박치옥 대령, ×군단 포병단장 문재준 대령, 야전군 ○사단장 박춘식 준장, 사단장 채명신 준장, 2군사령부의 핵심이던 2군 공병참모 박기석 대령, 이들 모두가 박 소장과 직결되어 있었지요. 그리고 거사 당일부대 출동의 실질적 책임자였고…다만 5기생들의 상당수가 장도영 총장의 측근들이었고 그 때문에 얼마 뒤 혁명주체에서 거세되었기 때문에 공식기록에서 5기의 활동상황은 많이 빠져 버린 것이지요.』
8기생 그룹의 조직확대는 개별 접촉이었고 긴 설명 없이도 선뜻 응낙해 수월했다는 것이 한결같은 증언이다. 그 위에 조직의 확대도 여러 갈래의 정군 내지 거사준비 그룹과 재빨리 손잡게되어 혼선 없이 주류를 형성할 수 있었다. 육사8기와 9기 출신의 합류경위에 대한 9기 대표K씨(전 청와대 대변인) 의 증언.
『그 당시 육사5기·8기·9기 출신들이 별도로 뭉치고 있었어요. 해병대와 공수단도 마찬가지였고 소문으로는 족청 출신장교 (족청은 초대 총리 겸 국방장관이던 이범석씨가 조직한 청년단체)서북청년단 출신장교 (서청은 월남한 우익진영 청년조직)들도 따로 모임을 갖고 있었어요. 우리9기는 서울시내 몇 개 토목공사를 위해 남산에 주둔 중이던 4개 공병대대를 주축으로 거사를 해보려고도 했어요.
대대장들이 모두 9기 출신이었으니까요. 육본작전참모부장 보좌관이던 나는 박 소장이 육군작전 참모부장에서 2군 부사령관으로 전임한 60년 12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여러 차례 사령부로 내려가 만났어요. 박 소장이 9기 출신도 8기와 합치라더군요. 이래서 3월초 충무공에서 8, 9기 연석회의를 했지요. 이때 개별 포섭을 하며 3월말까지는 포섭자 명단을 밝히지 않고 합동회의도 않기로 했어요.

<8기는 정, 9기는 부>
그래서 이 기간의 연락은 오치성 대령이 8기를, 내가 9기를 맡았어요. 그런데 8, 9기간의 관계가 순탄치 않았어요. 8, 9기는 거의 같이 승진해 대부분이 중령이었고 더러는9기가 먼저 진급되거나 상위직책을 맡고 있는 경우도 많았거든요. 여담이지만 조직문제 협의를 하는데 김종필씨 (당시는 예편된 후임) 가 9기 장교들에 관한 평가를 하는데 대부분이 정보참모부에서 자기와 같이 있던 9기를 얘기하더군요. 그런데 그 중의 내 동기Y중령을 <좀 모자라는 친구…믿기 어렵다>라고 하잖아요.
나도 화가 나서 8기 명단을 보니까 맨 위에 김형욱이 적혀 있습니다.
당시 그는 우리 참모부 소속의 전투발전과 부과 장이었거든요. 그래 그 이름을 가리키며<돌대가리…쓸모 없는 친구>라고 했지요. 나중에 이 얘기가 본인에게 전해져서 화가 잔뜩 나가지고 찾아와서<너 이리 나와, 뭐 내가 돌대가리라고?>하면서 펄펄 뛰어요.<사실이 그런 게 아니고 하도 우리9기 모두를 무능하다느니 해서 나도 약이 올라 8기 명단을 보니까 김 중령 이름이 있잖아, 그래서 한마디 한 거다. 홧김에 얘기로 뭘 그러느냐>고해 간신히 진정시켰어요. 어쨌든 8기가 선배라 8기를 정, 9기를 부로 하여 조직을 짜기로 했어요. 그런데9기생은 아예 제쳐 놓으려해 다투게 됐습니다. 거사를 송두리째 흔들리게 한 위기였지요. 결국 9기가 밀려서18명은 개별활동을 하기로 됐고 그동안 8기들과 접촉해온 김제민 박순권 김원희 정치갑, 그리고 나까지5명만이 부서에 배치되었습니다.』
공수단과의 연결도 충무장 파에겐 못하지 않았던 수확이다. 박치옥씨 (육사5기·당시공수단장)의 증언.
『전주에서 연대장을 할 때 최재명·이원엽·김치백·노창석 대령 등 동기생들과 거사를 의논했습니다. 말(정군건의)로는 안되니 무력으로 할 수밖에 없다고. 뜻을 모으고 임무를 분담했지요. 그러다 보니 서울 근교 부대의 지휘관을 맡는 것이 필수조건이었어요. 그래 내가 장도영 총장을 찾아가 공수단장을 맡아 보고 싶다고 했지요.
장 총장의 배려로 공수단장으로 부임한 직후인데 김제민 중령 등 몇 사람이 와서 거사를 해야한다고 하기에 동감이지만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지요. 그러던 4월초 박정희 소장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있어 종로의 모 음식점으로 나갔더니 육사동기인 ×군단 포병사령관 문재준 대령도 나왔습디다.
박 소장이 대뜸<동생. 할거야 안> 그럽디다. 그래서 <그거 (혁명)하려고 공수단장 맡은 거요>하니까(나하고 같이 하는 게 어때>라고 합디다. <같이 하는 것도 좋지만…형님이 주축이냐>고 했더니<장도영 총장과 손잡고 있다>고 말하더군요. 공수단장도 내 청을 장 총장이 받아주어 된 거니 그렇다면 좋다고 했지요. 그랬더니 장 총장과의 연락은 박 소장이 취하겠다고 해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거사 당일 밤 장 총장이 부대동원을 중지하고 대기하라고 했을 때야 손잡았다는 것이 사실이 아님을 알았습니다만…그때는 이미 내친걸음이었지요.
이날 저녁 밖에 대기해 연락 같은 걸 하던 사복차림의 사람이 미심쩍어 누구냐고 했더니 박 소장이<내 조카 김 중령이야>라고 해 처음으로 김종필씨를 보았지요.』
5·16거사의 좌초를 건져낸 것은 해병대다. 이들은 거사직전의 정보누설로 육군의 출동부대가 혼란에 빠져있던 때 아무런 제지도 받음이 없이 계획된 정시에 출동해 한강을 넘는 제1선 출동부대가 되었다.
그런 해병대가 육군의 박정희 소장과 연결된 것은 만군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윤근씨(당시 해병여단장·최고위원)의 증언.
『해병 상륙 사단장이던 김동하 장군이 만주군관학교1기. 박정희 소장이 2기, 내가 3기지요. 육군의 이주일 장군도l기지요. 이런 연고로 ♀리는 줄곧 가깝게 연락을 하고 자주 만났습니다. 그러다 김동하 장군이 60년에 뜻 아닌 예편을 하게되었지요. 그 당시 나는 해병대사령부 참모부장이었고 박 소장은 육본작전참모부장이었습니다.
나는 선배인 김 장군을 위로하기 위해 자주 김 장군댁을 찾았지요. 그때마다 박 소장도 와 있어서 셋이 어울려 술잔용 나누며 시속얘기로 울분을 달랬지요. 김 장군의 돌연한 예편은 사연이 있었다고는 들었지만 그 내막을 나는 확실히는 모릅니다』이제 그 사연으로 옮아가자.
4·19직후인 5월초 박정희 소장이 송요찬 참모총장의 퇴역을 건의한 일, 그리고 때마침 부산의 혁신계 데모사건을 계기로 송 총장이 해병사단을 포함한 2, 3개 사단의 부산지구 증파를 계획, 「매그루더」의 승인을 요청한 일은 연재5회에서 기술했다.
이때 송 총장은 해병사단장이던 김동하 소장에게 출동 후 현지 계엄군의 지휘권을 확보해 증파 후 설치 될 통합지휘부의 명령을 김 장군이 집행할 수 있도록 사건에 현지 상황을 조사하도록 지시했다는 것. 그런데 김 소장은 현지에 내려가선 송 총장의 지시와는 달리 박 소장과 단둘이서 저녁을 함께 하며 두 사람은 밤늦도록 술잔을 나누며 얘기를 했고 이 자리에서 김 해병소장은 송 총장의 지시내용을 모두 털어놓게 된다.

<김동하 장군의 예편>
이리하여 그 이틀 뒤 과도정부의 이종찬 국방장관이 송 육참 총장이 세운 부산지구병력증파계획의 타당성을 알아보기 위해 부산에 왔을 때 박 소장은 그런 사태변화의 배경을 설명할 수 있게된다. 즉 증파의 필요가 없다는 것. 그럼에도 갑작스런 증파계획을 세운 배경엔 다른 의도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많은 자료를 제시할 수 있게된다.
이런 곡절로 송 총장의 계획은 좌절된 데다 더욱 난처한 입장에 놓이고 만다 (당시 해병대는 육참 총장의 지휘권밖에 있었으나 계엄령에 따라 계엄사령관인 육참 총장의 지시를 받았음) . 이런 일이 있은 얼마 후 김동하 소장은 군복을 벗게됐다. 그리고 김 장군의 이런 불운을 인연으로 박 소장과 김 소장의 유대가 다져졌다.
이에 대해 김윤근씨는『내가 알기로는 송 총장이 증파 후의 문제에 대한 어떤 지시를 했다는 것은 믿기 어렵고 물은 일도 없다. 내가 알기로는 김 장군의 예편은 당시의 해병대사령관 김대식 중장과의 불화 때문이다. 표면상의 구실은 따로 있지만 그것은 밝힐 수 없다』고 했다.

<만나면″잘돼간다〃>
해병대의 합류에 대해 혁명사는『60년6월부터 시작된 해병대의 정군 운동은 9월 들어 그 규모가 커져 본격화되었다. 그러면서 어느새 김윤근 준장이 지도자로 추대되어 있었다. 61년 들어 해병대의 정군 운동은 단독거사 추진으로 선회했다. 이들은 61년4월15일 해병대 창설기념일을 D데이로 정한다. 그것을 김 준장이 육군과 함께 하도록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대한 김윤근 장군의 증언.
『나는 61년2월 예정보다 6개월 앞당겨 해병 여단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당시 박 소장은 2군 부사령관으로 서울을 떠나있었다. 내가 부임인사차 들렸더니 박 소장은 내 손을 굳게 잡으며<하늘이 도왔소. 김 장군만 믿겠소>그러면서 거사계획의 윤곽을 설명해주었어요. 퍼뜩 울분을 달래던 김동하 장군 댁에서의 기억이 떠올랐지만 이처럼 구체화된 계획을 듣고 보니 어리둥절했어요.
목숨을 걸어야 할 수 있는 일이었거든. 나로선 부대 상황도 모를 때고 어쨌든 귀대해 엄두를 못 낸 채 혼자서 애만 태우는데 어쩌다 외출해 박 소장을 만나면<잘 되어가고 있소>가 인사였지. 그러던 중 어느 날 대대장 오정근 중령 등이 찾아와<이대로 보고만 있을 겁니까. 해병대 단독으로 해 치웁시다>며 흥분들을 했다. 나는 맘속으로 이제야 동지를 만났구나 하고 쾌재를 불렀지만 내색을 않고 있었지. 그들은 그 후에도 두 차례나 여단장 실로 나를 찾아왔지. 세 번째 왔을 때 비로소 나는 박 소장이 중심이 된 거사계획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육군과 합류케 한 것이다. 이들은 선뜻 알겠습니다.<여단장만 믿고 따르겠습니다>고 하더군. 내가 여단장이 되고 대대장이 먼저 접근해오고 그래서 5·16의 선두부대가 된 것 등이 지금 생각해도 숙명이랄까 우연이랄까 그런 기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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