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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호의 문학 터치] 그는 OB팬이었다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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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2003년 긴 머리 치렁대며 그가 나타났을 때, 그러니까 슈퍼맨.원더우먼.베트맨.아쿠아맨 등 지구 지키느라 분주한 영웅들을 모두 섭외하는 데 성공, 초대형 스펙터클 규모로 슈퍼특공대의 활약상을 공개했을 때('지구영웅전설'), 그리고 두달쯤 뒤 프로야구 원년 15승65패란 전대미문의 기록을 세운 삼미 슈퍼스타즈의 숭고한 희생 정신을 이어받고자 떨쳐일어선 비밀 결사조직을 추적했을 때('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당시 문단 반응은 크게 두 갈래였다.

'이것도 소설이냐'이거나 '이래도 소설이냐'.

그리고 이태가 흘렀다. 아니 2년밖에 안 됐다는 게 영 믿기지 않는다. 작가 박민규(37)는 오늘 그만큼 깊이 각인돼 있다. 그의 두 등단작은 오늘도 서점 스테디셀러 코너의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진열돼 있고, 그 사이 주요 문예지들은 그의 단편들을 소개하기 바빴다.

기존 소설 이론을 깡그리 무시한 글쓰기, 황당무계한 사건이 예측불허의 농담과 함께 이어지는 내러티브, 소외된 군상들의 궁상맞은 삶, 뚜렷한 대중문화 코드 등등. 소위 '평론'이란 글은 박민규란 미스테리한 작가를 대체로 이렇게 풀이했다.

그 사이 발표한 단편 10편을 묶어 소설집 '카스테라'(문학동네)를 출간하고는 서울 인사동에 출현했을 때 그는 "소위 평론이란 글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나랑은 상관없는 어느 외계의 이야기"라고도 했다.

작품집은 여태 알고 있던 그를 확인사살하는 절차다. 전생이 훌리건이었을 것으로 확신되는 냉장고 속으로 아버지가 들어가고 나중엔 미국도 들어가고('카스테라'에서), 인도양의 한 섬에서 살았던 도도새를 비롯해, 화성인, 기린, 개복치, 미 프로레슬러 헐크 호간까지 소설 속 등장인물은 여전히 기상천외하고 그들이 엮어내는 삶은 파란만장하다.

작가와 대면한 자리에서 몇 번 놀랐다. 어디선가 농담처럼 밝힌 '커닝을 해 대학에 붙었다'는 말은 실제로 사실이었다! 그리고 마냥 찧고 까부는 성격이 아니었다. 매우 심각한 얼굴로 그는 말했다. 6년째 치매에 시달리는 어머니 약값을 대기 위해선 열심히 글을 써야 한다고. 가장 놀란 건 그가 삼미 팬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는 소설에서 그토록 경멸했던 OB 팬이었다. 고등학교까지 울산에서 살았다. 치밀한 자료 조사와 50여 명을 취재해 '삼미…'를 썼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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