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with] 유병민씨의 영사기사 체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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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시네마 천국’의 알프레도 아저씨 기분이 이랬을까. 자신이 틀어준 영화를 관람하는 동생(앞줄 왼쪽)과 엄마(앞줄 가운데)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유병민군.

중학교 때가 마지막이었다. 녀석과 함께 영화를 본 건. 영화 '말아톤'의 주인공 초원이처럼 자폐증을 갖고 있는 병훈이(18). 유난히 '그림' 보는 걸 좋아하지만, 집중력이 떨어져 오래 앉아 있지 못하는 내 동생. 녀석만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동생에게 '영화 보는 재미'를 가르쳐 줄 수 있다면…. 영화 '시네마 천국'의 영사기사 알프레도 아저씨와 꼬마 토토처럼 영화를 통해 서로의 꿈과 사랑, 우정을 나눌 수 있다면….

동생을 위해 영사기사 체험에 도전한 대학생 유병민(20)씨의 가슴 뭉클한 사연에 week&과 메가박스 코엑스점이 함께 팔을 걷었다. 형제를 위하여, 두 사람의 '시네마 천국'을 위하여.

정리=김한별 기자<idstar@joongang.co.kr>
사진=김태성 기자 <tskim@joongang.co.kr>

형이 준비했어, 사랑의 '시네마 천국'
영사실이야 공장이야

침침한 조명, 낮은 천장, 알몸을 드러낸 파이프, 층 전체를 뺑 돌아가며 자리 잡은 덩치 큰 기계들, 그리고 그 기계들이 토해내는 낮고 밭은 소음…. 영사실에 대한 낭만적 환상은 댓바람에 깨졌다. 작고 아늑한 다락방을 상상했는데, 이건 꼭 무슨 큰 공장 같다.

"스크린 하나짜리 단관 영사실하고는 많이 다릅니다. 이곳에선 16개 관 영사기를 한꺼번에 다 관리하니까요."

영사실 경력 20년의 김달천(40) 부실장은 내 맘 속을 읽기라도 한 듯 빙긋 웃으며 말한다.

"그렇다고 사람이 많은 건 또 아닙니다. 영사기사는 3명이 전부예요. 3명 1개 조로 3교대 24시간 근무를 하거든요."

16개나 되는 영사기를 그 5분의 1밖에 안 되는 인원으로 관리하는 비결은 자동화된 설비. 요즘 영사기는 프로그램 세팅만 해주면 혼자 뚝딱뚝딱 다 알아서 한단다. 조명 끄고 필름 돌리고 사운드 내보내고…. 필름을 풀고 감아주는 일도 마찬가지다. 3단으로 된 플래터에 필름을 얹고 영사기에 걸어 주기만 하면 그걸로 끝이다. 위에서 필름이 풀리는 동시에 아래쪽에선 자동으로 되 감긴다.

"아예 필름을 안 쓰는 경우도 있어요. 1관에 설치된 디지털 영사기는 필름 대신 120기가짜리 하드디스크를 씁니다. 영상.음악.자막 등 모든 영화 소스가 다 디지털 정보로 처리되죠."

이렇게 모든 설비가 자동화되다 보니 영사기사의 역할도 과거와는 달라졌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오퍼레이터가 아니라 엔지니어. "단순히 영화를 돌리는 게 다가 아니라 영사기 세팅부터 상영 중간 중간 이상 체크, 고장 발생시 응급수리까지 해야 한다"는 게 김 부실장의 설명이다.

그래도 기본은 손 감각

물론 자동화가 됐다고 수작업이 모두 다 없어진 건 아니다. '기본'은 여전히 사람 몫이다. 5~6권짜리 필름을 한 벌로 잇고 영사기와 플래터에 거는 일 등은 일일이 사람 손을 거쳐야 한다. 김 부실장이 먼저 편집 시범부터 보여준다. 리와인드 판과 스프레이셔를 이용해 빠르게 필름을 잇고, 마지막으로 이상 유무 테스트까지 해야 한다. 특히 인상적인 건 테스트 작업. 필름을 빠르게 돌리며 이음매 처리, SDDS.SRD 등 사운드 트랙 손상 여부를 손가락 촉각만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엄지와 검지를 가장 자리에 살짝 대세요. 필름이 빠르게 돌아가니까 너무 꽉 잡으면 베거나 화상을 입을 수도 있어요."

쉽지 않다. 꼼꼼히 코치를 받으며 여러 번 반복해 봤지만, 간신히 이음매 위치만 알아낸 게 고작이다. 그것도 필름 돌리는 속도를 평소보다 확 낮추고 난 다음 일.

필름 거는 건 더 까다롭다. 플래터와 영사기에 달린 롤러 숫자가 어림잡아 30여 개. 순서.방향에 맞게 끼워야 하는 데 오락가락한다. 거기다 김 부실장은 "필름에 생채기를 내면 화면에 '비'가 줄줄 오게된다"며 겁을 준다. 영사기 프로그램 세팅도 꼭 확인해야 할 일. 요즘은 한 상영관에서 시간대별로 다른 영화를 올리는 일이 흔하다. 영화마다 특성이 다른 만큼 거기에 맞춰 영사기 세팅을 조정해줘야 한다. 가령 영화 '댄서의 순정'은 화면 종횡비율이 1.85:1이지만, 그 다음 영화 '킹덤 오브 헤븐'은 종횡비율이 2.35:1이다. 세팅 바꾸는 걸 깜빡한다면 화면 좌우가 왕창 잘리게 된다.

마지막 장애물은 시간이다. 영화와 영화 사이 남는 시간은 보통 10분 남짓. 그 안에 필름 다 걸고 영사기 세팅까지 마쳐야 한다. 숙련된 영사기사야 1분 30초면 충분하다지만, 나 같은 '초짜'에겐 어림없는 일이다. 실습하며 시간을 재보니 평균 7~8분이 보통. 아슬아슬하다. 김 부실장은 "그나마 눈썰미가 있어서 빨리 배운 편"이란다.

사랑한다, 내 동생

4시간여에 걸친 체험은 눈 깜짝할 새 지나갔다. 이젠 '알프레도'가 되는 일만 남았다. 영사실 창 밖으로 병훈이를 위해 비워놓은 좌석이 보인다. 만감이 교차한다. 병훈이 녀석은 알까? 그간 잘해주지 못한 걸 내가 얼마나 미안해하고 있는지를, 뇌종양에 걸린 형과 철없는 말썽꾸러기 동생, 두 꼬마 형제 얘기를 다룬 영화 '안녕, 형아'를 고른 것도 그 때문이란 걸.

영사기 플레이 버튼 위에 올려놓은 손등에 방울방울 진땀이 떨어진다. 드디어 영사기를 돌릴 시간. 손가락에 살짝 힘을 싣는다. 차르륵~ 필름이 돌아가고 영사기에서 빛이 쏟아진다. 그리고 그 뿌연 빛줄기 너머 엄마 손을 잡고 극장 안으로 들어서는 병훈이가 보인다. 녀석, 3년여만의 극장 나들이에 흥분했을 법도 한데 비교적 침착해 보인다. 오후 내내 묵직하던 가슴 한 켠이 비로소 가벼워진다. 어서 와라, 병훈아. 사랑하는 내 동생, 형이 들려주고 싶은 얘기가 아주 많단다. 어둠 속에 잠겨있던 스크린이 차츰 환하게 차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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