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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6화 호맥인맥|두가지 기록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내게 조그마한 복이 있었든지, 화가의 이름 덕이었는지 몰라도 전쟁말기의 어려운 시기를 여주에서 군수·경찰서장·판사들과 어울려 별 어려움 없이 지냈다.
그 중에서도 여주경찰서 유촌경무주임이 퍽 고맙게 했다. 초야서장이 내겐 잘했어도 천상 약삭빠른 일본사람이었지만 유촌은 그렇지가 않았다. 경찰이라기보다는 그냥 선비였다.
자녀가 없어 내외간에 단출하게 살았다. 그 무렵은 너나없이 식량이 걱정이었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집에서 농사지은 쌀을 가져다 먹었어도 여름철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한번은 유촌이 나를 은밀히 부르더니 쌀이 있느냐고 물었다. 자존심도 있고 해서 차마 없단 말을 못하고 어름어름했더니 저녁에 집으로 사람을 보내라고 해 쌀 몇말을 얻어먹은 일이 있다.
이뿐이 아니다. 유촌은 다른 사람 같으면 생색을 낼 일도 자연스레 넘기곤 했다.
그는 마주앉아 바둑을 두면서 『지나간 이야기인데 장선생에게도 보국대영장이 나왔더군요』하고 말머리를 꺼냈다.
유촌은『읍사무소에서 명단이 올라왔는데 내가 보니까 몸이 악해 견디지 못할 것 같아 지워버렸지요』하고는 바둑돌을 놓았다.
유촌의 사람됨은 이처럼 덕성스러웠다. 나는 여주에서 살면서 성천(신영)을 만났다. 그때 성천은 여주군청에 근무했다. 가끔 우리집에 와서 저녁도 같이 먹고 술도 마셨다.
성천은 그때마다 『장형! 이 고비만 잘 넘기시오. 곧 해방이 될겁니다』고 격려했다.
나는 여주에 살면서 두가지 기록을 세웠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머리를 짧게 깎지 않고, 각반도 치지 않았다.
여주읍에는 이발소라야 두세곳 밖에 없었다. 이발소마다 긴머리를 깎아주지 못하도록 엄한 지시가 내렸는데 나는 머리를 박박 깎기가 실어서 이발소에 잘 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1년 내내 머리를 깎지 않고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어쩌다 이발소에 가면 꾀를 부렸다.
이발소 의자에 앉으면 주인이 바리깐을 들고 어떻게 할까요 하고 물었다.
나는 쓰다 달단 말없이·눈을 지그시 감고 앉아서 처분만 기다렸다.
그럼 이발사가 길게 깎아주었다. 이발사도 내가 군수·경찰서장·판사들과 친하게 지내는 걸 알아차리고 어쩔라드냐 싶어 용기를 내서 그냥 깎아준게 아닌가 생각된다.
그때는 짧게 깎는 마주가리와 주민복 착용이 의무적이었는데 나 말고 또 한사람의「여주무법자」가 있었다.
평안도사람으로 여주에와 공예를 하고있는 옥씨가 있었는데 이양반 성격이 둥실둥실한 호인인데도 머리깎기는 사뭇 싫어했다. 그래 옥공의도 나처럼 머리를 깎지 않는 사람으로 주목을 받았다.
일제가 최후의 발악이라도 하듯 국민생활에 규제를 가해 각반만 안쳐도 차를 못타게 했다.
그때는 궤도가 좋은 기차이긴 해도 여주에서 수원까지 다니는 기차가 있었다.
또 서울을 내왕하는 여주∼서울간 시외버스도 있어서 그런대로 나다니는데 지장이 없었다.
그런데 여주역과 시외버스정류장에 경찰이 지켜 서서 각반을 차지 않은 사람은 차를 태워주질 않았다.
나는 서울에라도 한번 나가려면 각반 때문에 홍역을 치러야했다.
각반도 없었지만 그걸 치는 게 죽기보다 싫었다.
그래 양복바지를 한복 대님 매듯이 접고는 그 위로 양말을 올려 신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까짓 각반 좀 친다고 조선사람의 근본이 바뀌는 게 아닌데, 왜 그런 고집을 부렸는지 모를 일이다. 여주생활의 막바지에 나는 초야서장을 찾아온 가등송림에게서 들어서는 안될 말을 들어 지금까지 개운치 않은 뒷맛이 남아있다.
선전의 심사위원을 역임한 가등송림이 서울남산의 대화정 아래윗집에 살던 초야를 찾아 그림을 팔러 여주에 와서 여러날 묵었다.
초야서장이 가등송림이 왔다고 자기집에 나를 초대, 함께 저녁을 들면서 이 얘기 저 얘기를 나눴다.
가등송림이 묵고 있는 여관에 화첩도 받을 겸 찾아갔다가 나는 그에게서 이구선생에 대한 서운한 이야리를 들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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