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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09)제76화 화맥인맥(28)|월전 장우성|초상화에 관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내가 초상화에 관심을 갖기는 본격적으로 그림공부를 시작하기 훨씬 전인 어렸을 때의 일이다.
우리 집에서 10여 리 떨어진 이천 땅에 엄락암이란 선비가 살고 있었다.
엄락암은 우리 할아버지(장석인)와 같은 금계 이근원 문하의 학 인이었다.
이 댁에서 우암(송시열)영정을 모시고 있어서 1년에 한번씩 공개했다.
영정을 공개하는 날엔 잔치를 베풀고 선비들이 모여서 한담했다.
영정을 공개하는 행사를「영정봉변」이라고 했는데 할아버지가 꼭 이 행사에 참석하셨다.
우암 영정 봉심은 대학자인 우암 선생의 뜻을 기리고 업적을 숭모하는 의미도 있지만, 요즘으로 말하면 선비들이 모여서 자유토론을 하는 세미나나 같았다.
또 1년 내내 방안에만 두었던 영정을 내서 먼지를 털고 볕을 뵈고 바람을 쐬는 일도 겸해서 한 것이다.
할아버지를 따라간 곳이 바로 이 엄락암 선비 집이었다. 나는 이 집에서 분홍두루마기를 입고 댕기꼬리를 늘어뜨린 동창 원충희를 처음 만났다.
그때 내 나이 7, 8세 정도였으니까 동창도 나와 같은 또래의 장자였다. 동창도 할아버지를 따라 이곳에 왔었다.
여기서 사귄 동창은 그가 작고할 때까지 나와 교분을 나누었다. 동창은 서예도 잘 했을 뿐 아니라 서화골동품 감식가로 이름을 떨쳤었다. 동창의 조부 원두능궁도 우리 할아버지와 같은 금계문인이어서 우암 영정을 봉심 하러 온 것이다.
나는 여기서 동창과 동무가 되어 함께 놀면서 우암 영정 봉심 행사를 눈여겨봤다.
우암의 초상화를 보면서 나도 저렇게 그릴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우암의 영정에 누런 물이 들어 있었다.
선비들이 모두 그걸 보고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저런, 영정에 누런 물이 들었구만….』『저게 웬일이여』하고는 안타까워했다. 그 말을 듣고 혀가 짧은 엄락암 선비가『거풍하려고 내놓았다가 애들이 살구를 똑 떨어뜨려서 그만 익은 살구 물이 들었습니다』고 변명 아닌 해명을 했다.
우암 영정은 그림이긴 해도 풍채가 좋고 실물 같은 느낌을 주었다.
우리마을에 살던 대원군과 같은 집안인 이참서(이민응)댁에도 채룡신이 그린 이참서 백씨의 초상화가 있었다.
등신대 만한 영정이었는데 얼굴이 세밀하게 묘사되고 음영까지 나타나 있었다. 의복도 무늬까지 그려서 꼭 사람이 서 있는 것 같았다.
그 영정을 보고『나도 커서 저런 초상화를 한번 그려보겠다』고 속으로 단단히 다짐했다.
내가 그림공부를 하면서도 영정에 대한 쇼크는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이당(김은호)문하에 들어가 인물화의 중요성을 새삼 깨우치고, 또 인물화로는 당대의 1인자로 꼽히던 이당 선생의 필치를 눈썰미 있게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건 내가 내 마음 속 깊이 다진 초상화제작의 신념을 실천하기 위한 준비과정이었다.
그래 그림공부가 제 궤도에 오를 무렵 나는 나와 약속한 영정제작의 꿈을 실현시켰다. 맨 먼저 할아버지 초상화를 그리고 이어서 아버님(장수영), 어머님(태성선)의 초상화도 제작했다.
온갖 정성을 다 하고 내가 가진 기량을 한껏 발휘해서 그린 초상화 여서 인지 남들에게 실물과 똑같이 잘 그렸다는 평을 들었다.
나의 첫 번째 초상화인 할아버지영정은 6·25사변 중에 그만 분실되어 조부가 돌아가셨을 때만큼이나 서운했다.
그래 아버지 영정은 내가, 어머니 영정은 아우(장우홍)가 나누어 지금도 알뜰히 봉안하고 있다.
내가 선전에 입선도 하고 조부와 부모의 영정을 잘 그렸다는 소문이 퍼지자 초상화제작 주문이 들어왔다.
내게 맨 먼저 초상화제작을 부탁한 분은 한문학자 권오돈씨(단국대동양학연구소)의 선친인 악재 권영우 공이다. 그 어른도 금계문인으로 일대에서는 명성이 자자했던 학자였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던 권영우 공이 내게 사람을 보내 영정을 했으면 좋겠다고 해서 우리 집에서 30리 가량 떨어진 점동면까지 자전거를 타고 갔다.
그 댁에 가서 권영우 공을 뵙고 본을 떠 가지고 와서 초상화를 그렸다.
이 영정은 아들인 권오돈 씨가 모시고 있으면서 제사 때마다 내걸고 분향을 했다. 지금은 장손인 권 영씨(여의도 고교교사)가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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