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기의 反 금병매] (4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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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5면

"내가 한 집안에 여자 여러 명을 거느리고 있는 걸 보시오. 내가 성질을 부리면 그 여자들이 남아 있겠어요? 넓은 마음으로 여자들을 품어주고 있으니 그들이 서로 다툼이 없이 지내는 거 아니겠소."

서문경은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넓은가를 보여주는 듯이 슬그머니 가슴을 내밀어 보였다. 왕노파는 속으로, 넓은 마음 좋아하네 하면서도 말은 다르게 나왔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어르신 마음 너그러우신 것은 이 늙은이를 대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의 조건은 문자 그대로 한가해야 한다는 거지요. 남자가 사업이나 장사에 바쁘기만 하면 바람피울 여가가 없지요. 그런 사람은 바람을 피우더라도 영 즐기는 재미가 없다 이거지요. 번개에 콩 구워 먹는 식으로 하다가는 괜히 바쁜 일 하나 더 보탠 격이 되고 말지요."

"한가하기로 따지면 이 청하현에서 나만큼 한가한 사람도 없을 거요. 생약 가게야 점원들이 다 맡아서 팔아주고 나는 하루에 한두 번 들러 돈만 챙기면 되니까. 물건 가져올 때 흥정하는 일은 내가 직접 챙기긴 하지만 그 나머지는 시간이 남아돌아 주체할 수 없다 이거요. 내가 할멈 찻집에 자주 드나드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지 않소?"

"그러니까 어르신은 바람을 피울 수 있는 다섯 가지 조건, 반.여.등.소.한을 골고루 다 갖추고 있는 셈이네요. 그럼 슬슬 일을 추진해볼까요? 우선 선금 은 닷냥을 가지고 오시고, 남색 명주 한 필, 하얀 명주 한 필, 하얀 비단 한 필, 그리고 질이 좋은 솜 열 냥을 사가지고 오시오."

"명주와 솜들은 사서 뭐하게요?"

"뭐하긴 뭐해요. 일을 진척시키려고 그러지요. 이 일은 말이죠, 대개 열 단계를 거치게 되는 법이지요."

"바람 피우는 다섯 조건 운운하더니 이제는 일을 진척시키는 열 단계라? 아이구, 왜 이리 복잡하오? 바람 한번 피우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네."

"어르신은 바람 한번이라고 말씀하시지만, 바람 잘못 피우다가는 목숨이 왔다갔다 한다는 거 모르세요? 그러니 신중에 신중을 기해 한 단계씩 일을 진척시켜 나가야 한다고요. 일단계는 어르신이 사다 주신 명주와 솜들을 우리 집에 갖다놓고 금련을 찾아가는 거예요. 내가 달력을 좀 빌리자고 하면서 길일을 택해 바느질을 해달라고 부탁을 할 거예요. 그때 금련이 길일을 택해주기만 하고 바느질은 해주지 않겠다고 하면 일단계에서 일은 끝나고 말지요. 그러나 금련이 길일을 택해주면서 바느질도 해주겠다고 하면 일단계는 성공한 셈이지요. 이단계는 금련이 자기가 말한 대로 우리 집으로 와서 내 대신 옷을 짓는 거지요. 삼단계는 내가 점심 때쯤 술과 음식을 준비하여 금련을 대접하는 거지요. 금련이 속이 불편하다면서 음식과 술을 먹지 않고 돌아가면 일은 삼단계에서 끝나지만, 금련이 순순히 내가 차려온 것을 먹으면 삼단계도 성공한 셈이지요."

"아이구, 답답해서 할멈의 말을 가만히 앉아 듣고 있지 못하겠소. 사단계, 오단계 빨리 빨리 말해보세요."

서문경이 찻잔에 마지막으로 남은 화합차를 후르륵 들이켰다. 왕노파는 오히려 심호흡까지 해가며 더욱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사단계는 셋째날 어르신이 우리 찻집에 나타나는 거예요. 문 앞에서 기침으로 신호를 보내며 나를 찾는 시늉을 하세요. 그러면 내가 즉시 나가서 어르신을 찻집으로 모셔들일게요. 그때 금련이 어르신을 보고 급히 몸을 일으켜 자기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면 일은 거기서 끝나는 거고, 금련이 어르신을 보고도 몸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사단계도 성공한 거지요."

"셋째날이라 그랬소? 사흘이나 기다리라는 말이오? 이거 환장하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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