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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맞는 농촌을 돌아보니…|올핸 실속 있는 풍년 됐으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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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추곡수매 마감날인 12윌26일 전북 김제군 백구면 월봉2리의 수매현장.
『풍년은 풍년인가 봐요. 작년 같으면 정미소 뒷마당에 쌓아 놓은 쌀 도둑 지키느라 야단을 떨었을 텐데 이즈음에는 그냥 내놔도 아무 탈이 없는 것을 보니-』(이장 조덕래·50) 옆에 서 있던 군 직원이 신이 나서 말을 거든다.
『그러 문요. 우리군의 경우 한 마지기에 평균 2가마 나던 쌀이 이번에는 3가마나 됐습니다요.』그는 이어서 그 동안의 영농지도가 얼마나 치밀했는가를 자랑스럽게 설명해 나갔다.
멀찌감치 있던 한 농부(이상호·66)가 다가왔다.

<"높은 분께 전하소">
『신문사에서 왔소. 내 말 잘 들었다가 서울가면 높은 분들께 좀 전해 주시오. 풍년이 들어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에 요. 쌀값이 싸 서울사람들만 좋지. 작년 이맘때 쌀 한가마 5만4천원 하던 것이 지금은 기껏해야 4만9천 원이요.』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모여들어 이구동성으로 싼 쌀값을 원망했다. 정부 수매 값이 가마당 5만2천6백 원이니까 시중에 내다 파는 산지쌀값은 그보다도 3천6백원 가량이 더 싼 실정이라는 것이 요지였다.
사다 써야 하는 다른 물가는 죄다 오르는데 풍년이 들었다고 해서 유독 농민소득의 원천인 쌀값만 왜 거꾸로 떨어지고 있느냐, 비료값·농약 값은 물론이고 하루 7천∼8천원 먹히는 품삯에도 사람 구하기 어려워 농사 못 짓겠다, 이대로 가다간 2∼3월 등록금 철을 만나 또 한두 차례 쌀이 쏟아져 나오면 쌀값은 더 떨어지지 않겠느냐, 도대체 외국에서 사들여 왔다는 전입 미는 얼마나 쌓여 있는 것이냐. 신학기등록금은 또 얼마나 더 올리는 것이냐….
단순한 쌀값문제가 아닌 듯 했다. 도시가계와는 같은 소비자의 입장에서 기업들과는 같은 생산자 입장으로서의 눈에 보이지 않은 불공평을 ,호소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어쨌든 대 정부 건의사항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한결같은 대답이『1, 2월쯤 정부수매를 한번 더 해 달라』 는 것이었다. 시중 쌀값이 계속 정부수매 값을 밑돌 전망인데다 일반 미의 상당수가 수확기에 내린 비 탓으로 채 말리지 못했기 때문에 정부의 추가 수매가 절실하다고 입을 모았다.
풍년 기근은 김장대목을 겨냥했던 채소의 경우 더 심각했다. 같은 백구 면의 동자마을은 몇 해전부터 비닐하우스로 일약 부자동네로 소문이 났지만 올 가을의 채소풍년으로 생산된 배추의 절반 가까이 를 땅속에 파묻거나 캐내지 않고 그대로 방치해 두고 있었다.
1천4백 평의 배추비닐하우스를 하는 배규현씨(44)는 한 포기도 안 팔고 모두 땅속에 파묻어 보관했다. 절반도 못 건지겠지만 도저히 지금 값에는 팔 수 없으니 앞으로 오르면 캐다 팔고 그렇지 않으면 아예 거름으로 하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배씨의 어림계산에 따르면 배추 한 트럭에 20만원을 받는데 들어가는 비용은 ▲서울까지 운임8만원 ▲상 차비 3만원 ▲중간상인에게 지불하는 구전 1만6천원 ▲청소 비 6천원 그밖에 종자 값·품삯 등을 제하고 나면 아름 들이 배추 한 포기에 20∼30원밖에 안 치니 자신의 노량도 안 떨어진다는 설명이다.

<소비량 크게 줄어>
봄 배추를 심기 위해 다시 비닐하우스를 손질하고 있던 배씨는 오히려 풍작을 걱정하고 있었다.
풍년타령은 배·사과·귤 등의 과수원 주인들도 마찬가지였다. 풍년도 풍년이지만 절약 무드가 팽배한 나머지 최근 2∼3년 동안 과일소비자체가 크게 줄어든 것이 결정적인 타격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비교적 값이 싼 제주 산 귤이 과일시장의 새 강자로 등장하는 바람에 상대적으로 배와 사과 경기는 더 위축될 수밖에 없다.
『물건 나가는 것으로 봐서는 지난해이후 배 소비량이 최소한 30%이상은 줄어든 것 같아요』
경기도 안성군에서 6천 평의 배 과수원을 하는 하흥식씨(45)는 아마 선물 안주고 안 받기 운동에도 상당한 영향이 있는 듯 하다고 말했다.
추석 전까지 만 해도 15kg들이 한 상자 당 4천원 가던 배 값이 대목이 지나자 2천 원으로 떨어져 한때는 도매상들이 물건 도로 가져가라는 소동까지 벌어졌었단다.
다행히 지난11월부터 수출길이 열려 조합에서 상자 당 4천2백원에 수출 배를 사들이는 덕분에 시중시세도 4천원 선으로 다시 회복되고 있다.
값을 좀 더 받을 수 있는 대신 수출 배는 알이 크고 잘 생긴 최상급 품만을 골라 대야 한다. 나머지 흠집 있는 배들은 상자 당 2천∼3천 원으로 시중도매상에 넘겨지니까 그게 그것이라는 설명이다
거의 전량을 수출한다는 하씨는 그래도 배 값 폭락을 수출이 막아 주고 있다고 여간 다행스러워 하지 않았다.
이러나 저러나 농민들의 첫 번째 공통된 고민거리는 빚 갚는 걱정이었다. 빚 갚기 위해 제값 못 받고 일년농사를 내다 파는 농민들이나 아무리 독촉을 해도 농사자금 회수실적이 제자리걸음이라고 동동 발을 구르는 농협입장이나 딱하기는 매일반이었다.
80년 흉작 때 갚지 않은 빚까지 밀려 있어 짐은 더 무거워졌다. 급한 김에 이 잣돈과 압류를 안 당하는 최저선인 원금의 20%만 우선 갚도록 궁리하고 있지만 농협직원과 한창을 실랑이해야 한다.
빚 걱정은 주택개량사업으로 번듯하게 새집 지어 놓고 사는 농가일수록 더 심각했다. 고속도로나 국도연변에서 자주 보는 그런 집들이다.
강원도 횡성군 곡교리 유근식씨(57)의 경우 지난 78년 초가집을 헐고 방 3개 짜리 깨끗한 양옥집을 마련했다. 4백 만원 건축비중에서 2백70만원을 융자받았는데 이것이 문제였다.
매월 부어야 하는 2만4선원씩의 부금을 1년 이상 연체하고 있다는 것이다.
같은 횡성군에서도 비육사업으로 부자마을이 된 남산리의 경우는 기껏해야 슬레이트지붕집들인데 비해 오히려 가난한 마을이라는 곡귤리는 거의가 청기와 홍 기와를 얹은 맵시 나는 집들이었다. 사나흘동안 여기저기를 다녀 봐도 젊은 사람들을 거의 볼 수 없었다. 추곡수매를 하러 나온 농민들도 대부분이 50줄은 넘어 보이는 듯 했다. 이농현상을 말해 주는 것일까.

<교사가 남아돌아>
올해 66세라는 이씨 노인은『이래봬도 내가 보통일꾼은 되는 모양 입니 더. 농사철에는 나더러도 선품 삯을 줄 터이니 일 나오라고 사방에서 성화 에요.』
자신의 6남매 중 4아들부터도 농사짓는 아들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충남연기군 전의국민학교를 찾아갔다. 신입생 숫자를 물었더니 79년에는 1백78명, 80년 1백60명, 81년에는 1백50명으로 계속 줄고 있다는 교장선생님의 설명이다. 여기에 전학으로 빠져나가는 20명 정도를 합치면 최근 2∼3년 동안 학생수가 70∼80명이 줄어들었다는 계산이다.
거기서 4km쫌 더 외진 곳에 자리한 달성국민학교의 경우는 더했다.
5년 전에는 한 학년 당 2학급씩 모두 12학급이었던 것이 지금은 절반인 6학급에 학생총원 2백54명.
13명이었던 선생님도 7명으로 줄었고 교사가 남아돌아 작년에 3동을 뜯은 데 이어 며칠 전에 또다시 1동을 뜯어냈다.
학교운영조차 곤란해지고 있다는 당직 선생님은 이러다간 시골국민학교도 통폐합하자는 이야기가 안 나올지 모르겠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부모들이 도회지로 떠나니 아이들도 자연 줄어들 수밖에 없는 일이다.
이리로, 서울로, 부산으로, 부모가 아니더라도 서울 사는 누나 집에라도 갈 수만 있다면 가는 편이, 보낼 수만 있다면 보내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농민인구는 국민전체의 27%을 차지하고 있다. 그동안 많이 줄어들었지만 낮은 생산성 면에서 볼 때는 그래도 많다는 주장을 많이 한다.
전체인구의 10%로까지 농촌인구를 줄이고 기계화를 하는 길만이 생산성을 높이는 방법이라고 한다.
그러나 양만 따지고 있지 질은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같은 1상자라고 해서 수출용으로 알 크고 맛좋은 최상급만을 골라낸 배와 나머지 흠집 나고 시들한 것을 모아 남은 찌꺼기 배 한 상자하고는 같을 수가 없는 일이 아닌가.
농촌의 근대화·기계화를 모두가 바라고 시도하고 있지만 막상 일을 치러 낼 주체인 노동의 질은 날이 갈수록 노후·퇴화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한 노인은 우리 세대가 죽고 나면 누가 농사를 짓겠다고 할 지 모르겠다고 걱정이었다.

<글=이장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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