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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03)제76화 화맥인맥(22)|월전 장우성|위창 오세창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내가 위창(오세창)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가친회갑(임오생) 기념화첩을 받을 때였으니까 1942년이었던 것 같다.
그때 위창 선생은 익선동 옆 지금은 없어진 수은 동에 살고 계셨다. 전형적인 조선집인데 큰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거쳐 중문에서 안채와 사랑채로 갈라지는 길을 만났다.
사랑채는 일각대문을 또 한번 거쳐야 들어갈 수 있었다.
위창 선생이 기거하는 사랑방에 들어가 큰절을 하고『그림 공부하는 아무개인데 아버님 회갑을 맞아 화첩을 만들어 드리려고 하니 글씨 한 폭 써 주십 사』하고 정중히 부탁드렸다.
위창 선생은 나에게『월전 화백이 어른을 위하는 일인데 내가 하나 해 드리지』하고는 흔쾌히 화첩을 받아 들었다. 그 어른은 어디서 들었는지 내가 선전에서 연3회 특선하고 최고상까지 받은 걸 알고 계셨다. 그리고는 격려도 해주셨다.
첫눈에 뵈어도 키가 크고 몸이 수척한 분이란 걸 느낄 수 있었다.
얼마 후에 찾아갔더니 위창 선생은 가친의 아호인 일재에게 옹형을 붙여 깍듯이 존대하고, 육십일수 축이란 방 서를 달아「삼다구여」라고 써 주셨다. 이때 위창 선생의 연치는 79세였다.
이런 일이 있은 몇해 후 나는 시골집에 있던 중국의 명가 연기창의 10여 지나 되는 글씨 축을 가지고 진가를 가리기 위해 위창 선생 댁을 찾았다.
동기창의『천마 부』는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것인데 글씨 한자가 주먹만큼씩 크게 써 있었다.
위창 선생은 글씨 축을 펴 들더니 대뜸『이거 팔 거여』하고 물었다. 위창 선생의 눈치로 봐서 좋은 물건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냉큼 『팔 건 아닙니다』고 대답했다.
끝까지 다 홅어 본 연후에「대종백인」「기창」이라고 새긴 주먹만한 낙관까지 들여다보고 나서『글씨는 좋군』하고 뜸을 들이더니『진짜다 가짜 다하고 내가 어떻게 말할 수 있나』하고는 뒷말을 흐렸다.
내 속단일는지 모르지만 그분의 태도로 봐선 자기에게 넘겨주었으면 하는 바람인 것 같았다.
하지만 아버님께 여쭤 봐야 할 일이어서 그냥 물고 나왔다.
그런데 이 무슨 묘한 인연인가…. 위창 선생의 선친 역매(오경석)공이 중국사신으로 갔다가 받아 가지고 은 동심(금농)의『매화』가 내 손에 들어온 것이다.
동심은 팔대산인·정판교·나양봉과 함께 양주팔괴의 한사람일 뿐 아니라 매화에는 1인자로 꼽히던 명가였다.
동심의『매화』에는 장지동·오대징 같은 당대의 명인들이 쓴 찬이 붙어 있다.
이 그림은 동심이 그려서 조선 국에서 온 오역매 공에게 선사한 것인데 그림이 아주 좋다고 칭찬한 글이 써 있고 장지동과 오대징의 낙관까지 되어 있다.
장지 동은 유명한 정치가이고 오대징은 당대의 서화대가였으니 역매공의 안목이 높았음을 짐작할 만 하다.
역매 공의 초 호는 진재였고 당 호는 천죽 재이다. 본시 역관이어서 외국문물을 빨리 받아들였다.
지추의 벼슬로 연경에가 원·명이래의 서학 1백10점을 구득 해 온 것은 귀하게 여기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삼대진한의 금석, 진 당의 비판도 수백 종을 구해 왔다.
역매 공은 예서를 특히 잘 껐으며 산수화에도 능했다. 그가 펴낸『삼한 금석 록』은 금석학연구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위창 선생은 1886년에 박문국주사로 막성 주보 기자를 겸하고, 농상부참의·체신국장 등도 역임했다.
개화당사건으로 일본에 망명했다가 돌아와 천도 구에 입교, 만세보·대한민보사장으로 일하면서 개화운동에도 공이 많았다. 3·1운동 때 민족대표로 분연히 나섰던 일은 다 아는 사실이다.
위창 선생은 서화·전각의 감식과 보 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전서·예서를 잘 썼을 뿐 아니라 자신이 직접 전 각한 대가였다.
당대의 서화가들이 다투어 위창 선생의 전각을 얻고자 했음은 그 솜씨가 뛰어남을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는 일이다.
위창 선생이 선친 역매 공이 수집한 우리나라 서화가의 사적을 보관하여 1928년에 간행한 「근역서화징」은 서화인명 전으로서 뿐만 아니라 산 미술사로서도 가치가 높다.
위창 선생의 숙부인 석년 오경윤·균정 오경림·환암 오경연도 모두 서화에 일가를 이루었다
나는 서화협회 일로 석정(안종원)선생도 몇 차례 만났다.
석정 선생은 어려서 한학을 배우고 양정의숙에서 법률을 전공했다. 졸업 후에는 양정학교의 교원·학 감을 지내고, 양정고보의 2대 교장을 역임했다.
그는 서예에 일가를 이뤄 이름을 떨쳤다. 관철동 석정 댁에는 현판글씨가 많이 붙어있어 눈길을 끌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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