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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리 더 낮추면 물가 잡을 수 있다"|정주영 전경련회장이 진단하는「오늘의 한국경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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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지난해는 가계·기업 할 것 없이 모두들 어려운 한해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올해는 주름이 쫌 펴져야 할텐데, 새해 경제를 어떻게 전망하십니까.
▲정 회장=새해를 맞으면 언제나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되지요.
작년도 지금처럼 기업의 재무구조가 나빴고 그해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많았지만 기업 하는 사람들은 연초부터 열심히 하면 경제가 나아질 것으로 내다보았는데 사실상 재무구조는 더욱 나빠졌습니다. 물론 지난해 나아진 회사들도 있지만 그것은 전체의 3분의1이 안 될 것입니다. 나라살림도 외채가 더욱 누적되었고요. 이처럼 한나라경제의 절반이상이 나빠진다면 물론 기업에도 책임이 크지만 정책에도 책임이 있지 않나 봅니다.
새해에도 확실한 것은 하나도 없어요. 그러나 아무리 어려워도 다시 새로운 희망과 기대를 걸어 보는 것이 기업 아닙니까. 이런 가운데서도 새해경제에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원유 등 에너지가격과 세계불경기에 따른 원자재 값이 안정될 것이고 고금리체제의 선진국들이 불황으로 인한 실업증가 때문에 고금리에서 점차 후퇴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겠지요. 원자재 값 안정과 세계금리인하 추세는 우리에게 매우 고무적입니다.
이 두 가지 점에서 볼 때 올해는 우리도 물가를 안정시키고 국내 고금리도 신속히 내릴 수 있게 되어 전반기에 열심히 하면 후반기에는 물가도 안정되고 경기가 솟아날 것으로 봅니다.
다만 하나 강조하고 싶은 것은 1차 석유파동이후 저금리정책을 유지해서 투자를 진작시킨 나라들은 세계경기에 관계없이 물가도 안정되고 수출도 늘어나 방대한 원유 가 부담에도 불구하고 국제수지를 안정시킬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고금리만이 물가를 안정시킨다, 물가가 안정돼야 금리를 내린다 하는 나라들은 물가안정에도 실패했고 투자진작에도 실패했습니다. 이런 점을 감안해서 정부는 고금리가 물가도 안정시키고 모든 균형을 가져다준다는 생각에서 탈피하면 새해에는 좋은 성과가 나타나리라 봅니다.
국내금리가 우리의 경쟁상대국수준만큼 안정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우리가 성장해도 부채를 갚는데 급급하게 되어 어려운 문제는 다시 이월될 수밖에 없어요. 그렇게 되면 결과는 지난해와 똑같이 기업은 부채의 누적, 나라경제는 외채의 누적을 안은 채 또 다음해로 넘어가게 될 것입니다.
-지난해는 모두 어려웠지만 특히 가계와 기업의 타격이 컸던 것 같습니다. 경기를 보는 시각에서 정부와 민간사이에 상당한 격차를 나타낸 것도 그런데서 비롯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지난해 경제를 민간의 시각에서 한번 평가해 주시지요.
▲정 회장=80년의 어려운 상황을 딛고 그나마 경제를 침체의 바닥에서 끌어올리느라 정부·민간 모두 애썼지요. 그런대로 성과를 얻은 것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것도 있겠지요. 정부와 기업인들이 외채를 줄이지 못하고 50억 달러나 누적시킨 점, 고금리로 대부분의 기업들이 재무 구조를 개선하지 못한 것은 마음 아픈 일입니다.
일부에서는 작년 물가가 크게 안정된 것으로 평가하고 있으나 내 생각으로는 얼른 공감이 안갑니다. 왜냐하면 80년의 물가폭등이 순 경제요인이라기보다는 정치·사회불안 등 경제외적요인이 더 크지 않았습니까.
그런 요인들이 지난해에는 많이 없어졌기 때문에 상대적인 물가안정은 자연스런 추세지요. 오히려 경쟁상대국인 대만·홍콩·싱가포르 등과 비교하면 작년 물가는 결코 성공적이라 보기 어렵지요. 이런 나라들이 모두 10% 훨씬 못 미치게 물가를 안정시킨 데 비하면 우리의 14∼15%는 아직도 높은 편입니다. 선·후진국 할 것 없이 물가는 10%이내라야 안정이지 그 선을 넘으면 후진국형 불안정물가로 봐야지요.
고 물가의 주원인은 여러 가지겠지만 과거 고 물가 인습에 너무 오래 젖어 왔기 때문에 우리도 10%이내에 안정할 수 있다는 인식이 기업·소비자·정부안에 미흡하지 않나 봅니다. 우리도 노력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금리가 물가를 안정시킨다는 논리는 아무래도 이해가 안 갑니다. 고금리는 투자를 냉각시킬 뿐 물가를 안정시키지 못해요.
금리는 높을수록 모든 원가에 직접 반영되므로 어느 나라든 고금리정책으로 물가를 안정시키자는 시도는 언제나 실패할 걸로 압니다.
-금리의 적정수준이 어느 선이냐 하는 문제는 전문가들조차 의견이 제각기 다른데 기업을 하는 입장에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정 회장=나라마다 때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겠지요. 그러나 길게 보아 나는 금리의 적정수준도 10%이내라야 한다고 봅니다. 금리가 10%를 넘는 나라는 언제나 그 이하의 나라에 뒤질 거라고 생각해요.
진정한 물가안정은 투자가 늘어나고 그 투자시설들이 가장 싼 코스트로 생산할 수 있어야 안정이지, 금융 수단이나 기타 정책수단에 의한 안정은 일시적일 뿐 언제나 인플레 재연의 가능성을 안고 있다고 봅니다. 따라서 물가의 진정한 안정은 효율투자에서 찾아야 합니다.
80년 초의 경험에서도 그랬지요. 그때 10% 고금리에서 한꺼번에 6%나 금리를 올렸지만 과연 물가안정을 이룩했느냐 하면 그렇지 못했어요. 물가효험은 못 본 채 자본시장만 타격을 받고 어느 누구도 이득을 보지 못 했지요.
그런 시책은 다시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과거 60년대 후반의 고금리 정책 때도 모든 기업이 고금리에 시달려 급기야는 8·3경제비상조치까지 낳게 됐지만 어쨌든 이 때의 금리인하로 힘을 얻어 1차 오일쇼크를 무사히 넘긴 셈이지요.
우리 경험으로 보면 고금리 때 물가가 오르고 저금리 때 물가가 내렸기 때문에 저금리가 물가를 자극한다는 논리는 공감할 수 없습니다.
-유효투자가 부진하다면 반드시 금리 때문만은 아니라고 보는데 다른 이유는 없을까요.
▲정 회장=투자라는 것은 창의적 기업가가 결정, 투자해야 가장 효율적입니다. 때문에 기업이 투자여부를 결정할 때는 정책의 방향이 자유기업주의를 존중하느냐의 여부에 영향을 받게 되는데 이 점에서는 기업인들이 믿을 수 있게 되었다고 봅니다. 관 주도의 투자는 자칫 전시효과에 치우쳐 비효율투자가 되기 쉽지요. 그래서 정부나 산업은행의 신규투자지원융자는 되도록 절반이하로 억제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래야 정부가 몰려들지 않지요.
-지난해는 연초부터 내내 불황이다, 아니다, 경기부양책이 필요하다, 아니다 하는 논쟁의 연속이었습니다. 민간의 경기판단과 정부의 대응은 어땠습니까.
▲정 회장=금리·통화 등의 정책수단은 탄력 있게 때를 맞추어 사전 대응해야 하는데 우리는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하지 않았느냐, 말하자면 시기를 못 맞추어 뒤쫓아가지 않았는가 생각합니다. 특히 금리 같은 것은 제때 해야 효력이 있지 때를 놓치면 효과가 훨씬 떨어지지요.
지난해는 거의 모든 기업이 부실해졌는데 이래서는 한국경제의 성공이라 보기 어려워요. 외형이나 지수는 나아졌는지 모르지만 한국경제가 좋아진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새해부터라도 금리는 더 내려야 합니다. 연간 국민소득의 6%가 외채이자로 해외에 유출되기 때문에 모든 국민들이 고통을 분담해야 하는데 어째서 특수, 거액 예금자와 대금업자만 보호받아야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워요.
외채가 있고 이자가 유출되는 한 금리는 물가보다 2∼3% 낮아야 진정한 고통의 분담이 됩니다. 기업은 부실해지는데 금융기관과 단자·금고 등 대금업은 전성시대를 이루고 있는 현실은 우리 금용 제도의 큰 모순입니다. 시중 은행과 제2금융권의 금리격차도 좁혀야 합니다.
또 하나 우리의 정책은 국민의 생리·능력·자질을 덜 감안한 채 서구이론에 너무 치우쳐져서 잘 안 되는 측면도 있어요. 일본만 해도 금융정책, 특히 금리정책은 물가조절을 위한 것이 아니라 투자변수로 활용해 오고 있지요. 이것은 서양의 합리라기보다 일본식 효율을 중시한 결과로 보는데 그것이 성공하고 있는 셈이지요.
-새해에는 무엇이 필요하며 정책은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 지에 대해 견해가 있으시면….
▲정 회장=에너지나 원자재가 대체로 안정될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정부가 물가를 14%로 본 것은 너무 높아요. 세계경제가 호황으로 돌아서기 전에 국제원자재가가 안정되었을 때 획기적으로 10%이내에서 물가를 안정시켜야 한다고 봅니다.
이를 위해서는 국민의 협조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정부가 솔선해서 먼저 공공요금이 안정돼야지요. 통화나 금리도 탄력 있게 신속히 움직여 경쟁국수준으로 운용되면 물가는 10%이내로 잡을 수 있고 효율투자도 확대되리라 봅니다. 가장 중요한 일은 모든 기업인들에 대해 희망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일인데 이는 정부가 어떤 난관이 있더라도 경쟁국과 대등한 조건을 조성해 주겠다고 신념을 가지고 약속하는 일입니다.
어떤 형태로든 희망이 주어져야 기업의 창의성이 불붙지 지금처럼 고금리·통화억제만 고집하면 기업이 실의에 빠질 수밖에 없지요. 이론체계는 다소 미흡해도 모든 기업들이 원하면 들어주는 것도 정치고 정책이 아닙니까. 이것은 단순한 돈의 문제가 아니라 융합하는 따스한 마음의 문제입니다.
-민간주의경제라는 말은 서로 받아들이는 자세부터 달라 아직도 뚜렷한 방향이 세워진 것 같지 않은데 이점 어떻게 보시는지요.
▲정 회장=한마디로 자기책임 하에 기업의사를 결정하는 자유기업주의로 가야겠지요. 이렇게 하자면 우리현실에서는 우선 은행과 기업에 맡기는 편이 바람직합니다. 민간의 자율적인 조직도 활성화돼야지요. 기업 쪽의 문제도 없지 않았는데 창의성 없는 기업이 관 주도에 편승해서 경쟁업종을 정부의 힘으로 흡수하거나 감면·혜택만 노리는 투자를 결정한 때문이었지요.
효율투자와 경쟁을 촉진시키기 위해 독과점도 단계적으로 경쟁시켜야 합니다. 시장이 좁다는 이유로 독과점을 더 이상 계속 방치해서는 생산성 향상이나 물가안정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오랜 시간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김영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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