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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02)혈맥인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나는 일본의 「신문전」과 미술계를 돌아보기 위해 동경에 간 일이 있다.
그때는 현초 (이유태)가 일본에서 공부(제국미술학교) 할 무렵이었으니까 1938년께 였던 것 같다.
일본의 국가주관 미술전람회는 1907년 「문전」(문부생미술전람회)으로 시작, 1919년에 「제전」(제국미술전람회)으로, 1937년에 「신문전」(신문부생 미술전람회)으로, 1946년에「일전」(일본미술전람회)으로, 1958년에「신일전」(사단법인 일본미술전람회)으로, 1969년에 「개조구전」(사단법인 일전)으로 탈바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일제시대 일본에 가려면 서울서 부산까지 기차를 타고 가서 관부연락선을 이용하기 일쑤였다.
요즘 새마을호나 특급열차에 해당하는 히까리나 아까쓰끼를 타고 하오4시쯤 서울을 떠나면 밤11시쯤 부산에 도착했다. 부산역에서는 출찰구로 나가지 않고 구름다리를 타고 직접 부두까지 갔다.
산바시라고 불리던 잔고는 지붕이있고 옆은 판자로 막아 긴집같이 되어 있었다. 여기를 빠져나가려면 형사의 검문검색을 받아야했다. 코너에 서있다가 용케알고 조선사람만 붙들었다. 그때의 여권은 본적지 경찰서장이 발행한 도항증이었다.
도항증이라야 인찰지에다 묵지를 대고쓴 여행목적과 경찰서장의 큼직한 직인이 찍힌 문서였다.
나도 예외없이 검색을 당했다. 도항증 검사는 무사통과였는데 현초에게 주려고 집에서 볶아가지고 간 고추장단지가 이상했던지 풀어보라고 했다.
새지 않도록 신문지로 싸고 또 싸서 풀기조차 힘들었다.
몇겹을 풀어나갔는지 신문지에 고추장이 배어있는 걸 확인하고서야 통과시켰다.
관부연락선을 타고가다가 세찬 풍랑을 만났다. 어찌나 흔들어대는지 시렁에 실은 짐이 떨어지고 화장실도 끈을 붙들고 다녀야할 정도였다.
나는 다행히 뱃멀미를 않는 사람이어서 괜찮았지만 선객들마다 대야 하나씩을 따로 받아 구토에 대비하고 있었다.
하관에는 아침6시쯤 도착, 기차로 동경까지 갔다. 그 기차속에도 이동형사가 타고 었었다. 그런데 이들은 한국에 있는 형사들하곤 매너가 사뭇 달랐다.
옆자리에 앉아서 도항증을 달라고 해 신문읽듯이 읽더니 미술계를 돌아보러 왔다는 여행목적란을 보고 금방 태도가 달라져 더 친절했다.
그 형사는 동경가서 구경 많이 하고 알찬 수확을 얻어가지고 무사히 돌아가라는 인사도 잊지 않았다.
내가 동경에 도착하니 현초가 연락을 받고 역까지 나와 있었다. 그가 묵는 하숙집에 가 집에서 가지고 간 고추장을 풀어놓고 같이 밥을 먹으면서 오랜만에 회포를 풀었다.
현초는 동경교외 무장야근처 한촌에 하숙하고 있었다.
나는 현초와 함께 상야미술관에 구경갔다가 우연히 이당(김선호)선생과 운보(김기창)·청계(정종여) 를 만났다.
그래 미술관앞 연못에서 기념사진도 찍었다. 우리들은 즉석에서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이당선생을 모시고 일본관광이나 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이튿날은 이당선생과 잘아는 호정환씨가 앞장서 일광구경을 떠났다.
화엄농·백운농 두폭포가 쌍으로 있는 곳에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갔다.
이 산에 올라가서는 저쪽의 폭포를 보고 저 산에 올라가서는 이쪽의 폭포를 관망했다. 「비류직하 삼천척」이라는 이백의 시가 떠오르는 절경이었다.
폭포수가 흘러서 호반을 이루는 중비사호에도 가보았다.
산을 수직으로 뚫어서 엘리베이터를 놓았는데 산을 뚫은 굴속으로 물이 흘러 떨어져 운치를 돋웠다.
관광을 마치고 와서는 당시 일본의 대가로 문전심사위윈을 역임한 시택현월씨를 찾아보았다.
나와 현초가 이당선생을 모시고 갔는데 그는 제작하다 나온듯 몬뻬 같은 작업복을 입고 허리디를 질끈 동여메고 나왔다. 만나기가 힘들다는 소문과는 달리 너무나 친절했다.
시택현월은 풍경·인물화룰 잘 하는 화가여서 주로 산수·인물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신문전」을 하는 전시장은 규모도 컸지만 회랑이 아주 넓었다.
작품도 모두 2백호이상의 대작들이어서 어마어마했다. 게다가 강렬한 극채색을 써서 보는 사람을 압도했다.
여기서 일본미술의 새로운 경향도 엿볼수 있었다.
신전에 있는 고서점거리를 보고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서울에는 책방이라야 손을 꼽을만큼 적은 때였는데 신전의 책사는 한 촌락을 이루고 있었다.
일본에 온김에 채색도 살겸 화방에도 들렀다.
이 무렵 한국에서는 물감을 사려면 관철동 박기홍 한약방을 찾거나, 본정(충무노)통에 있던 일본상회인 굴기상점이나 구하산방을 이용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일본여행에서 구경도 많이 했지만 문전경향을 알아보고 미술서적과 채색을 한아름 사온 것도 큰수확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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