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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한국판「마음의 행로」주인공…35년간 기억상실|77년에 다시 붓들어…재기 3년만에 타계|「선전」추천작가 못돼 타격 컸던듯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향당(백윤문)은 우리 후소회의원중 최고참이다. 나보다 6살이나 위여서 늘형처럼 대접했다. 그는 1925년 이당 문하에 들어가 41년 제4회 후소회전을 끝으로 기억상실증을 일으켜 42년 5회전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77년8월 다시 붓을 잡을때까지 35년간 깊은 겨울잠을 잤다. 사람들이 향당의 삶을 가리켜 한국판『마음의 행로』라고한것은 그가 정신분열증을 일으켜 옛날일을 모두 잊고 「화필의 동면」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홀연히 붓을 들고 잠을 깨 78년9월에는 서울 신문회관에서 개인전까지 열어 기적을 보여줬다.
그러던 그가 재기3년만에 영영 오지못할 극락세계로 가버렸으니 인간사란 참으로 부질없는 일인 것같다.
향당은 오원(장승업)홍세섭 정학교등과 함께 19세기를 빛낸 화가인 향석(백희배)의 친손자다.
향당집안에는 향석말고 향석의 8촌형인 임당(백은배)이 있었다. 임당은 도화서화원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해상군선도』와『대기도』등을 그린 풍속도화첩을 남기고 있는 당대의 대표적인화가다.
향당이 그림공부를 시작할 때 한의사이던 부친 백필용씨가 향당조부의 아호인 향석에서「향」자를, 방상의 아호인 임당에서「당」자를 따 가통을 잇는 훌륭한 화가가 되라는 뜻으로「향당」이라 작호했다는 것이다.
향당이 서울 재동네거리 교동국민학교 근처에 살매 나도 몇차례 놀려간 일이 있다.
규당(한유동)취당(장덕)과 내가 놀러가면 그는『어, 왔어』하고는 으레 한약방 앞에 있는 문간방으로 안내했다.
향당은 과묵한 사람이다. 방에 앉아서도 뭘 물어보면 한두마디 대답뿐 별말이 없었다.
나이차도 있었지만 우리하고는 잘어울리지 않았다. 같은 또래인 동강 정운포와 일관 이정호등과 가까이 지냈다.
송강 정철의 12세손인 동강은 광주에 내려와 4년간이나 살던 소정에게 그림공부를 시작,서울에도 내왕하면서 향당과 교분을 나눴다.
동강은 20세때「묵매」로 5회(26년)선전에 특선하고 3년후인 29년 8회선전에「산수」로 또한번 특선을 보탰다. 42년에는 일본 문전에도 입선, 꽤 이름를 날렸지만 48년에 개인전을 준비하다가 복막염으로 중단, 광주에 내려가 42세를 일기로 짧은 일생을 마쳤다.
일관은 그림보다는 글씨를 더 잘써 서예협회전에서도 서예가 입선할 정도였다.
향당은 27년 6회선전에「춘일」로 초입선, 화단에 등단했다. 그후 연5회 입선하고, 32년 11회선전에「촉규」가 특선을 따내 기염을 토했다.
34년 13회선전에「어사휘도」가 또 특선하고, 36년 15회선전에「위진팔황」이 특선에 올라 37년 16회선전에는「산증」을 무감사 출품했다.
39년 18회선전에「건곤일척」을 내서 특선을 얻었다.
향당은 39년부터 41년까지 3회에 걸쳐 선전특선작가전에도 출품했다.
선전에서 최고상인 창덕궁상·총독상도 받았지만 연4회 특선, 10년동안 6번의 특선횟수를 채우지 못해 추전작가가 되지못했다.
그가 몹쓸 병을 얻게된 연유도 선전에서의 좌절때문이 아닌가 싶다.
40년 19회선전에 출품한『수조』가 특선후보로 올랐다가 입선에 머무르는 바람에 더욱 실망이 컸던 것같다.
실력으로나 경력으로나 마땅히 특선으로 뽑아야할 낚시질하는 사람을 그린『수조』가 어이없게도 입선으로 처져 큰 쇼크를 받았던 게 아닌가 싶다.
향당은 말수가 적고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여서 응어리를 풀지못하고 끙끙앓다가 병이 된게 아닌가 생각된다.
꼭 될줄 알았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받는 정신적 타격은 여간 큰게아니어서 기억상실증이 생긴 게 아닌가 짐작된다.
향당이 잠에서 깨어나 화필을 다시잡았을 때는 며느리의 정성이 대단했다고 들었다.
향당이 깊은 잠에서 일어나 그림을 그릴 때면 꼭 한복을 찾아입었다는 것은 젊은 시절이 되살아났다는 증거였던 것같다.
그가 기억을 되찾은 78, 79, 80년은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마지막 작업을 할수 있었다는데 더큰 뜻이 있다.
한 작가에게 있어 말년작이란 어떤 의미로든 중요한 것이다. 향당의 선전시대작품과 재기이후의 작품은 사뭇 다르지만 하나로 이어지는 화맥을 찾을수 있었다.
그가 타계한후 아들(백송빈)과 며느리가 합심하여 미국워싱턴에서 추모전을 열었던 일은 참으르 고마운 행사였다.
올 9월에는 아들이 경영하는 백송화랑에서 향당회고전을 열고, 화집까지 발행해 그의 화업을 기린 것은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도 향당화집에 몇자 적어 그와의 교분을 회상한게 엊그제같은데 벌써 이해도 저물어가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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