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뭉치맡기고 돈빌어간 양말행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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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묵은 해가 가고 새해가 밝아온다. 세모의 거리는 구세군의 자선남비로 출렁이고 사람들의 발걸음도 공연히 바빠진다. 곧 제야의 종이 골목마다 울려 퍼지고 이 해도 저물겠지. 왠지 착잡하고 숙연하다. 새해의 설렘과 가는 해의 허망감이 엇갈린다.
연지 곤지 찍고 뾰족구두 신고 어른이되고싶어 안달한 기억이 어제같은데 어느새 나이먹는게 겁나는 중년이다. 아이낳아 키우며 정신없이 살다 문득 돌아보니 아무 내용없이 나이만 먹어버린 막막함이라니! 집구석에만 박혀 김치냄새나는 여편네로만 녹슬어버린듯한 의의와 갈등들. 분명히 싱싱한20대를 거쳐30대 중반이건만 혼자만 늙는것같은 억울함. 이대로 아무 대책없이 늙어 식구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자식들이 제 길을 찾아나서면 무엇이 나를 지탱해줄까.
중요한 건 언제 어디서고 나를 잃지않는 정신적인 그 무엇이다. 올바른눈으로 사람과 사물에 진실해지는데서 자기관성이 가능할것같다. 주어진 생활을 감사하며 내게 부닥친 어려움과 괴로움까지 사랑하고 하챦은 돌멩이 하나라도 소홀히지나치지 않도록 자기수양을 기울여야되리라. 그것만이 새해를 보람되게 하는 밑거름이 될 것같다.
돌이켜보면 올해엔 부끄러운 일 투성이였다. 우리는 조그마한 가게를 하는 데 유독 우리 가게 앞은 노점천국이다.
몹시 가난했었던(지금도 그렇지만)우리는 조점상들을 박절하게 쫒지못하고 보리차도 나눠주고, 전화도 바꿔주고, 저넉마다 물건을 맡아주기도 했다.
어느날 양말행상 청년이 어머니가 위독하다며 급히 돈좀 돌려달라고 애원했다. 사경도 딱하고 맡겨놓은 물건도 있고 설마하며 5만원을 꿔줬더니 그후 감감무소식이다. 혹시하고 양말꾸러미를 열었더니 물건대신 종이 뭉치였다. 그 충격을 어떻게 얘기할까.
누구에게 호소해야 모자라는 사람 취급받을까봐 쉬쉬 벙어리 냉가슴을 앓을수밖에 없었다.
그 후 우린 노점상들에게 물을 끼얹고 혹독하게 대했다. 보리차도, 전화도, 물건을 맡아주지도 않았다. 이래서는 안되는데, 거북하고 찜찜했지만 더이상 세상물정 모르는 부부로 이용당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새해부터 누가 뭐라건 그 충격을 딛고 일어서서 새로와지겠다.
잘해보려다 더한 배반을 당할지언정 자신이 자신을 배반한것 보다는 나을테니까.
어떤 일을 당하건 더럽혀지지 않고 싸워 이겨 자신을 강하게 키우겠다.
이제 가슴을 반듯이 펴고 새해를 정중하게 맞이할 차례다. 새해엔 즐겁고 풍성한 일만 생겼으면 좋겠다. 아빠의 일도 슬슬 풀리고, 가난한 사람은 부자가 되고, 병든 사람은 건강을 찾고, 사회가 안정되고, 나라가 부강하면 모든 주부들은 가족의 건강을 위해 알찬 식탁을 꾸밀것이며 그속에서 자신을 찾고 새로와질것이다. <서울도봉구창동655의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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