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합의 밥 먹듯 깨는 북한에 끌려다니지 말라

중앙일보

입력

북한이 평양에서 열리는 '6.15 통일대축전'에 참가할 우리 측 대표단 규모를 축소하라고 요구했다. 정부 측 대표 70명을 포함해 모두 685명으로 합의했던 방북단 규모를 220명으로 줄이라는 것이다. 합의문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약속을 식은 죽 먹듯 깨는 북한을 믿고 무슨 대화를 할 수 있는가.

이번 합의 파기는 우리가 자초한 측면이 크다. 북측이 남쪽을 얼마나 우습게 보고 있는지가 여실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통일대축전은 민간 단체들이 참여해 온 연례적인 행사다. 그런데 남측이 '비료 20만t을 줄 테니 정동영 통일부 장관의 방북을 수락하라'는 식으로 나오니 북측이 우리를 어떻게 보겠는가. 대북 정책을 총괄하는 남측 장관이 이렇게 평양에 못 가 안달하는 모습을 보이니 '우리가 약속을 깨도 남측이 거부하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을 북측에 심어준 것 아닌가.

이런 북한에 대한 정부의 반응은 더욱 한심하다. 북측에 합의사안 준수를 요청한 뒤 북측이 거절할 경우 참석 여부에 대해 고민하겠다고 한다. 이번 사안은 고민할 필요가 없다. 북측의 합의 파기를 먼저 비판해야 한다. 합의가 지켜지지 않으면 정부 대표단이 방북하지 말아야 한다. 합의를 서슴없이 깨는 북측과 무엇을 논의하고, 무엇을 합의하겠다는 것인가.

정부는 정 장관이 평양에 가면 북핵 문제를 포함한 남북관계 전반을 진전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북한의 이번 합의 파기는 우리 쪽의 이런 판단이 얼마나 단순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지난 실무회담에서 핵문제에 대해 북측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그런 사람들이 남쪽에서 장관이 왔다고 며칠 만에 태도를 바꿀 리 없다. 오히려 북측의 '민족 공조' 논리에 휘둘릴 수 있다.

이런 마당에 통일부 장관이 수백 명의 민간인과 함께 평양에 간다는 것은 애초부터 잘못된 전략적 판단이었다. 결국 비료만 주고 배신당하고 만 결과가 남북관계의 현주소다. 정부는 더 이상 북한에 끌려다니는 모습을 보여주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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