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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91)「협전」의 폐막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선전에 초 입선한 이듬해(33년)는 더 열심히 그려냈건만 유감스럽게도 낙선의 후배를 마셨다.
나는 예술의 길은 어렵고 험난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국전시대에도 불미스런 일이 많았지만 그때도 심사에 정실이 작용, 더러말썽이 되었었다.
일본에서 심사위원이 관부연락선을 타고 부산에 도착하면 서울에서 미리 내려가 있다가 심사위원과 함께 기차를 타고 오면서 자기가 출품한 작품사진을 보이고 그의 관심을 사기위해 점쟎지못한 행동을 했었다.
항간에는 이모, 정모가 수단을 부렸다고 소문이 파다했다.
나는 천성이 교(교)하지 못한데다가 집안 어른들이 세상은 원형리정대로살아야 한다고 가르쳐서 그런 재주는 부릴 엄두조차 낼수 없었다.
그저 부엉이처럼 하나에다 하나를 보태면 둘이된다는 것밖에 모르고 살았다.
그해는 비록 선전에서 실패했지만 협전에서 만회, 체면을 세웠다.
내가 선전에 초입선하던 32년에는 공교롭게도 협전이 열리지 않아 그때까지 한회를 앞서가던 협전이 33년부터 같은 회로 어깨를 나란히하고 자응을 겨뤘다.
34년에는 13회 선전에 신부가 단장하는 모습을 그린 『신장』을 출품해 입선을 따내고, 13회 협전에는 『백합』이 입선, 호평을 받았다.
35년에는 협전에『추적」이, 선전에『귀목』이 입선되었다. 이해부터 나는 서화협회의 정회원이 되었는데 불행하게도 다음해인 36년 15회를 끝으로 협전은 막을 내리고 말았다.
14회협전은 10월23일부터 30일까지 휘문고보강당에서 열렸다.
이때 동양화부에 입선한 회원은 김진자 조동욱 오일영 김기창 장우성 심인섭 이석호 진세빈 이용우 장운봉 조룡승 박승무 고희동 최우석 김중현 노수현 백윤문 장석표 이상범 지성채 정운면 등이다.
비회원 입선자는 원금홍 김희순 이용길 백아리 정종여 배렴 정운파 정용희 황종하 박내용 정도화 이순행 이승의 박원수 조남종 이뢰왕 민완기 이기용 김영기 조기순 이경배 등이다.
서양화부 입선자로 서화협회 회원은 도상봉 박광진 이제창 김중현 공진형 장석표 계승만 장발 윤희순 김용전 이종우 등이었다.
철마 김중현은 동·서양화 2부회원으로 두군데 모두 입선했다.
마지막이 된 15회 협전에서는 서부에 김돈희 오세창 안종원 이석호 민형식등 회원입선자 말고,일반부 입선자도 괄목할만 했다. 김문현 정현면 이명룡 민태직 허소 김치 노재천 윤석오 윤제술 안순동 원충희등이 입선했다.
일중(김충현)의 백씨 취인 김문현, 나와 교분이 깊은 서예가 추당 정현복, 한학자 동교 민태식, 국회부의장을 지낸 운재 윤제술, 이승만대통령 비서관을 역임한 소당 윤석오, 고서화 감정가로 이때 이미 서명을 날렸다.
36년 15회 선전에는 『요락』을 출품해서 입선했다.
이 해에 이당문하에서 그림공부하던 동문들이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클럽인 후소회를 창립했다.
후소회를 발족시킨 다음해인 37년 16회의 선전에는 『승무도』를 내서 괜챦은 평을 들었다.
『승무도』를 그릴때는 대작할 방을 구하느라 서울장안을 누볐다.
나와 현초(이유태) 운당(조용승)이 합자해서 명륜동4가에 있는 일본집 2층을 전세내서 썼다
이집 주인은 일본여자였는데 자매가 함께 살았다. 우리들은 2층 8조·6조짜리 다다미방 들을 툭터서 화실로 썼다.
이 방에서 나는 『승무도』를, 현초는 서울시청앞에 서있는 지게꾼을 묘사한 『가두소견』을, 운당은 여자가 발을 늘이고 앉아서 책 한권을 펴놓고 있는『춘향전』을 그렸다.
그림이 완성단계에 이르러 이당선생에게 보이려고 와주십사 했더니 뜸을 들이고 오지않아 애를 먹었다.
내가 표구사에 나간사이에 이당선생이 오셔서『승무도』를 보고는 좋다고 평했다는 이야기를 현초에게 전해들었다.
예비로 그려놓은『갈매기』를 가리키며 『이건 대가풍이 나는데』하고 칭찬인지, 건방지게 그렸다는 꼬집음인지 알쏭달쏭한 말을 했다고 현초는 『갈매기』도 출품하라고 부추겼다. 그러나『갈매기』는 떨어지고 『승무도』만 입선했다.
나와함께 그림을 그린 현초·운당의 작품도 모두 입선의 영광을 안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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