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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범 잡게 통신기록 조회권 줘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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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국세청은 최근 부동산 투기를 근절하기 위해 한 기획부동산 업체에 대해 세무조사를 했다. A사장이 운영하는 B컨설팅사는 토지가 매각될 때마다 평당 3만원씩 총 86억원의 자금을 빼돌린 혐의를 받고 있었다. 이 회사는 인건비와 작업비 등으로 가공 계상하는 수법을 사용했다.

하지만 조사해 보니 B컨설팅사는 이미 껍데기 회사였고 사장인 A씨도 재산이 하나도 없는 속칭 '바지 사장'에 불과했다. 세금을 추징할 대상이 없었다. 자금 추적을 집요하게 했지만 모든 자금 거래는 철저하게 현금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6개월이 넘는 자금 추적 끝에 간신히 조그마한 단서를 포착했다. 실사업자는 C씨로 확인됐다. 그러나 C씨는 이미 일주일 전에 호주로 투자 이민을 간 뒤였다. 세무조사 초기 단계에서 이 회사 자금 담당자의 통화 기록만 조회할 수 있었어도 C씨를 손쉽게 찾아내 101억원의 세금을 받아낼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요즘 이처럼 '얼굴 없는 탈세자'가 늘고 있다. 폭력조직과 연계된 유흥업소, 악덕 고금리 사채업자, 가짜 세금계산서를 발행해 탈세를 조장하는 자료상, 기획부동산 업자 등이 바로 대표적인 '얼굴 없는 탈세자'들이다. 이들은 '바지 사업자'가 재산이 없기 때문에 국세청이 세금을 받아낼 수 없다는 점을 악용한 것이다.

탈세자의 탈루 행위는 더욱 지능화하고 있다. 현금거래만 해 국세청의 자금 추적을 따돌리고 있다. 그러다 보니 요즘에는 숨어 있는 진짜 탈세자를 찾아내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이들은 '바지 사업자'를 전면에 내세우고 '김 부장'이니 '조 전무'니 하는 호칭을 사용하며 신분을 노출하지 않는다. 직접 만나 거래하기보다 전화.e-메일 등으로 얼굴 없는 거래를 한다.

얼굴 없는 탈세자들을 찾아낼 수 있는 방법은 있다. 통신기록을 조회해 보면 뒤에 숨어 있는 진짜 탈세자가 누구인지를 밝히는 데 결정적 단서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수사기관과 달리 국세청은 통신기록을 조회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

국세청이 통신기록 조회권을 갖게 되면 국민의 사생활이 침해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국세청이 조회하고자 하는 대상은 성실하게 세금을 납부하는 대다수 국민이 아니라 통신비밀보호법의 그늘에 숨어 있는 '얼굴 없는 악덕 탈세자'들이다.

조회 대상을 자료상, 악덕 사채업자, 조폭 관련 유흥업소, 기획부동산 등 '얼굴 없는 탈세범죄자'에 국한하도록 통신비밀보호법에 엄격하게 규정하면 대다수 국민에 대한 사생활 침해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5월 26일자로 공포된 통신비밀보호법은 통신기록 조회의 경우 법원의 허가를 받도록 하고 있다.

또한 통신기록 조회권을 국세청에 주면 다른 정부 부처도 통신기록 조회권을 요청할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하지만 이 또한 기우다. 조세범죄에 있어 1차 조사기관은 국세청이기 때문에 조세범 조사에 국한해 국세청에 통신기록 조회권을 줄 수 있는 것이다. 범죄수사나 조사권이 없는 다른 행정기관이 이를 이유로 통신기록 조회권을 달라고 할 수 없는 일이다.

시대가 바뀌면 제도도 바뀌어야 한다. 탈세범들은 첨단 장비를 이용해 활개치고 있는데 국세청이 예전의 수단만으로 이들을 추적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통신비밀보호법이 조속히 개정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대해 본다.

한상률 국세청 조사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