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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4. 땡볕 <17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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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부산항에서 승선하자마자 출전 축하식이 벌어졌다. 늘 하던 식으로 장교들과 하사관 몇 사람이 대표로 부두에 내려가 열을 지어 섰고 관료와 각계인사들이 나와서 연설을 하고 여고생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군악대가 우렁차게 군가들을 연주하는 순서였다. 나는 배 안에 지정된 침상에 올라가 누워 있었다. 다른 병사들은 오륙도와 부산항이 수평선 너머로 사라져버릴 때까지 갑판에 나가서 뱃전에 매달려 있었다.

우리는 대부분 자기가 무엇 때문에 전장으로 가는지 잘 알지 못했다. 대개는 그저 고생스럽던 내무반을 벗어나 새로운 곳으로 탈출하겠다는 생각이었을 테고 또는 월남에 가면 돈도 많이 벌 수 있다던데 하는 기대도 있었을 터이다. 일반 부대에서는 언제나 콩나물 소금국에 납작보리 섞인 밥에다 무 짠지가 전부였지만 파병되는 특교대에서는 꽁치를 넣고 끓인 콩나물국에 그야말로 '통닭'이 나왔다. 통닭은 끼마다 나오던 달걀 한 개를 병사들이 자조적으로 부르던 별명이었다. 그래도 이게 어디냐. 엄혹하던 규율도 화기애애하게 달래는 식으로 변했고 훈련 받노라고 몸이 좀 고되어서 그렇지 마음은 사회에서보다 더 편했다. 그러나 그들은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올 때까지 아니 오랜 뒤에 늙은 예비역이 되어서도 자기가 '붉은 무리 무찔러 자유 지키러 얼룩무늬 번쩍이며 정글을 갔다' 고 부르던 노래에 담긴 생각을 바꾸지 못했다. 초라한 귀국 박스에 씨레이션 깡통과 녹음기 따위의 전자제품 몇 점을 넣어 작은 마을로 돌아갔을 때에 절름발이가 되어 돌아온 병사에게 그의 아버지가 술 취한 목소리로 '남쪽나라 십자성'을 부르다가 푸념을 한다. 대동아전쟁 때에 내가 일본 놈들에게 남양 군도로 끌려갔던 것과 무에 다르더냐?

나는 한 다리 건너 친구의 친구였던 그를 기억한다. 그의 이름은 잊어버렸지만 박 철이라고 해두자. 철이는 어느 대학 영문과 학생이었는데 가끔 최민기가 데리고 우리들 술자리에 끼워주곤 했다. 나도 두어 번 그와 동석을 했던 적이 있었다. 그가 조지 오웰의 스페인 내전 참전에 대한 얘기를 했던 것 같다. 우리는 그 무렵에 할리우드가 내놓은 헤밍웨이 원작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보았던 얘기까지 곁들였다. 그러다가 상득이가 문득 말했다.

- 스페인에서라면 물론 반파쇼 전선에 가담해야 할 테고…. 가만있어 봐, 태평양 전쟁 때의 학병이라면 탈출하든지 적극적으로는 연합군 측에 가담하는 게 원칙일 테지. 그러면 베트남에서는?

모두들 입을 다물었지만 속으로는 일제 때와 같잖아, 하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학병 나가라고 적극 권유하던 식민지 지식인들 가운데서 이광수의 얘기도 나왔고 그는 정말로 일본을 중심으로 한 대동아적 세계관을 적극적 신념으로 가졌었다고도 말했다. 그때에 철이가 끝에 했던 몇 마디는 기억한다. 어느 상황에서나 감당할만한 한계가 있는 법이다. 상황은 같지만 우리는 북과 분단되어 있으므로 전선을 선택할 때에 스페인 식으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면서 그가 덧붙인 말은 이랬다.

- 소극적이긴 하지만 베트남에 가서는 절대로 안 될 것 같아요.

내가 그를 회상하려는 것은 그의 죽음 때문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는 자살했다.

그림=민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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