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울다 웃다 80年] 18. 무대 뒤의 실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8면

▶ 연구생들은 공연 전에 소품을 척척 구해와야만 선배들로부터 귀여움을 받을 수 있었다. 사진은 1970년에 출연했던 '호화선쇼'의 한 장면.

1948년이었다. 김화자가 사라진 뒤 나는 한동안 상실감에 허덕였다. 그래서 아세아 악극단에 들어갔다. 그를 잊기 위해 나는 미친 듯이 무대에 매달렸다.

여전히 연구생 신분이었다. 무대 뒤에서 연구생은 만능이어야 했다. 음향 효과를 내는 것은 물론 필요한 소품도 무조건 구해와야 했다. 당시만 해도 손목시계와 안경은 아주 귀한 물건이었다. 인텔리 역은 늘 안경을 껴야 했고, 멋쟁이 배역은 손목시계를 차야 했다. 그것도 관객의 눈에 잘 띄도록 소매를 일부러 걷어서 말이다.

막이 오르기 전 연구생들은 구석구석 객석을 누비고 다녔다. "구두 좀 빌려주세요." "안경 좀 빌려주세요." "손목시계가 꼭 필요한데요." 당시 관객은 순박하고 친절했다. 군말 없이 척척 빌려줬다. 한번은 안경을 빌린다는 게 그만 돋보기를 빌리고 말았다. 급히 무대에 나간 주역 배우는 돋보기를 쓴 채 연기하다 결국 무대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공연이 끝나자 선배들은 내 뺨을 갈겼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소품은 전적으로 연구생 책임이었다.

무대에서 주인공이 권총을 쏠 때 무대 뒤에서 화약으로 총소리를 내는 일도 연구생들 담당이었다. 화약을 매단 망치 머리를 돌멩이에 찧어 총소리를 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무대에 오른 배우가 총을 쏘는 순간 나는 얼른 화약을 찧었다. 그런데 불발이었다. 화약에 습기가 차서 터지질 않았다. 배우는 재치있게 대처했다. "아니, 이 총이 고장이 났나?" 대본에도 없는 대사를 읊으며 그는 총구를 들여다봤다. 그때 '빵!'하고 화약이 터져 버렸다. 객석에선 폭소와 야유가 동시에 터졌다. 공연은 엉망이 됐다. 막이 내린 뒤 나는 온갖 수모를 당해야 했다.

그렇게 여섯 달이 흘렀다. 나는 연구생 중에서도 꽤 고참이 됐다. 무대에서도 프롬프터를 맡았다. 막 뒤에서 배우에게 대사를 몰래 읽어주는 일이었다. 프롬프터에게도 노하우가 필요했다. 배우에겐 들려도, 관객한테 들려선 곤란했다. 너무 크지도 않고, 너무 작지도 않은 목소리가 관건이었다.

신파극을 공연할 때였다. 무대 뒤는 깜깜했다. 손전등도 없던 시절이었다. 나는 평소처럼 촛불을 켜놓고 대본을 읽어내렸다. 한 여인이 대학생 애인과 이별하는 슬픈 장면이었다. "꼭 가셔야만 하나요?" 나지막이 내가 읽으면 "꼭 가셔야만 하나요?"하는 여배우의 애절한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바로 그때, 무대 장치를 옮기던 연구생이 내 앞을 지나가다 촛불을 넘어뜨리고 말았다. 불은 꺼졌고, 앞은 깜깜했다. 성냥을 찾을 수도 없었다.

무대 위에선 난리가 났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비극적인 대사를 내뱉던 배우들의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극장에는 한동안 어색한 침묵만 흘렀다. 눈물을 질질 짜던 관객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무대를 쳐다봤다. 결국 막을 내렸다가 다시 올려야 했다. 그날 밤에도 내 입에선 곡소리가 났다.

배삼룡 코미디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