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 '유전 투자' 의혹의 핵심 왕영용 본부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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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영용 철도청(현 철도공사) 사업개발본부장이 철도청의 러시아 유전 사업 의혹의 핵심 인물로 급부상하고 있다.

이번 사건은 지난달 말 언론에 처음 보도될 때만 해도 철도청 상층부와 정치권의 공조 여부에 관심이 모아졌었다. 당시 김세호 철도청장(현 건설교통부 차관)과 신광순 차장(현 철도공사 사장) 등이 여권 실세의 도움을 얻어 사업을 무리하게 진행하다가 좌초한 것이 아니었느냐는 관측이 많았다. 그러나 왕 본부장이 전대월 하이앤드 대표 등 민간인 사업 참여자들의 지분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철도재단 이사장(당시 신광순 철도청 차장)의 위임장 위조를 지시했다는 사실(본지 4월 8일자 8면)이 밝혀지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이제 왕 본부장과 허문석 한국크루드오일 대표 등의 정치권 결탁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 왜 무리수를 두었을까=왕 본부장이 무리하게 사업을 밀어붙인 사실은 10일 한나라당이 공개한 철도청의 내부회의 문건에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지난해 8월 12일 유전사업 관련 회의에서 "유전사업은 이 사업을 주도하는 외교안보위(이광재 의원)에서 청(철도청)에 제의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철도공사 관계자는 "철도청 간부들을 설득하기 위해 현 정권의 실세가 배후에 있다고 과시한 것 같다"고 했다.

왕 본부장은 10일 기자회견에서 "허문석 박사가 '이광재 의원이 이런 사업(석유개발사업)에 관심이 있다'고 얘기한 것을 내가 이 의원이 제의했다고 말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는 또 당시 회의에서 "유전사업은 석유공사가 하이앤드사와 공동 추진할 계획이었으나 지분율 다툼으로 불참하게 됐다"고 참석자들에게 설명했다. 그러나 석유공사 측은 "지분율 다툼은 전혀 사실 무근"이라며 "사업성을 평가한 뒤 참여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석유공사도 참여하려 했을 정도로 사업성이 있다는 식으로 설명해 사업을 성사시키려 했다는 해석이다. 그는 또 회의에서 "유전사업 리스크 보장 차원에서 (이광재 의원 측에) 북한 건자재 채취사업을 역제의했다"고도 했다. 유전사업이 실패해도 별도의 안전장치가 있다는 의미다. 그러나 그는 11일 기자회견에서는 허문석 박사가 '유전사업이 실패해도 골재사업으로 만회할 수 있다'며 내게 제안했다"고 말을 바꿨다. 회의 석상에서 세 번씩이나 거짓말을 한 셈이다.

이에 대해 철도공사 관계자는 "건교부 관리 출신으로 철도청에 온 왕 본부장이 조직에 잘 융화되지 못하자 이번 사업을 성사시켜 그런 상황을 한번에 만회하려고 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건교부 관계자도 "왕 본부장은 특정사안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경향이 있었다"며 "이 건을 성사시켜 철도청 내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고 싶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혹=그러나 왕 본부장의 개인적 동기만으로 잇따른 무리수를 모두 설명하기에 부족하다. 왕 본부장은 지난해 10월 말께 이광재 의원을 처음 만났다고 했다. 그 전까지는 모르는 사이였다는 주장이다. 그럼에도 그는 왜 지난해 8월 12일 회의 석상에서 이 의원이 뒤에 있음을 자신있게 언급했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철도공사 관계자는 "누군가 왕 본부장에게 이 의원이 언제든 도와줄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준 게 아니겠느냐"고 했다. 그래서 애초 유전사업과 관련해 이광재 의원이 지난해 6월 전대월씨에게 소개해줬다는 허문석 박사의 역할이 주목되고 있다. 허 박사는 유전사업을 철도청에 소개한 장본인이다. 또 허 박사는 왕 본부장에게 "이 의원이 유전사업에 관심이 있다"고 얘기하기도 했다.

허 박사는 철도청 부대사업 자문 등으로 2, 3년 전부터 왕 본부장을 알고 있었고, 전씨와 왕 본부장은 지난해 8월 처음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단순히 이 정도 얘기만으로 왕 본부장이 이 의원의 도움을 확신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감사원 관계자는 "허 박사가 이 의원과의 친분이나 연계 여부 등을 왕 본부장에게 자주 과시하지 않았나 하는 의심이 든다"고 했다. 허 박사는 철도청의 유전 투자 사업이 무산된 직후인 지난해 말 광업진흥공사를 찾아가 북한 골재사업 참여를 제의했던 것으로 확인돼 그의 행적에 더욱 의혹이 쏠리고 있다. 결국 사건의 전말은 왕 본부장.허 박사.전씨의 관계, 이들과 정치권의 관계를 밝혀야 제대로 드러날 전망이다.

강갑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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