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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3265>|제75화 패션50년 (46)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68년10윌 오랜 숙원이던 패션전문지 「의상」을 창간한데 이어 그해 12월에는 국제복장학원을 지금 위치로 옮기는 대이동을 치렀다.
6l년3윌 개원해서 그때까지 세로 들어 있던 계성여고앞 전조폐공사 건물은 해가 바뀔수록 집세가 자꾸 올라 영리사업이 아닌 학원경영으로는 감당하기가 벅찼다.
그래서 학원을 옮겨갈 마땅한 건물을 물색하던중 퇴계로 남산국민학교 앞골목에 있는 초라한 2층집을 발견하게 되었다.
건물도 겨우 2층까지 짓다만 것이었지만 골목에는 너저분하게 쓰레기가 쌓여있는등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선듯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당장 가진 돈으로는 더 나온 것을 구하기도 어려워 그 건물을 사서 무리를 해가며 7층까지 지어 올렸다.
연건평 5백여평의 새집으로 이사를 한 것은 그해12월-. 1백여명의 학생들이 비좁은 교실에서 붐비던 먼저와는 달리 널찍한 교실마다 30명 정도의 학생들이 공부하게되자 교육효과도 한층 높아져 다행이었다.
계성여고앞에서 지낼 때는 큰 방이 없어서 학원생 전체가 모여 행사를 치를 때마다 커다란 강당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었기 때문에 새 건물의 7층은 전혀 칸막이를 하지 않고 그대로 터서 강당을 만들었다.
그래서 사회 저명인사를 초빙해 교양강좌를 열거나 교내 작품발표회 혹은 연말마다 갖는 불우이옷돕기 자선바자회장소로 썼다.
그리고 교실도 더러 빈 방이 있어서 꽃꽂이 전문가를 모셔다가 매주 꽃꽂이 강습회를 갖는등 그때까지 교실형편상 양재교육에만 치중하던 시야를 한층 넓혀 좀더 교육다운 교육을 해보려 여러가지 계획들을 마련해 보기도 했었다.
학생들도 제대로 갖추어진 시설속에서 공부하게 되자 새삼 긍지와 의욕을 느끼는듯 수업태도도 한층 진지해져서 대견스러웠다.
이처럼 새 건물로 옮겨와서 첫입학생을 모집하던 69년초에 재미난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기획실장으로서 학원 운영을 돕고있던 맏아들 신현우(현「의상」사 사장)가 신입생 모집에 색다른 광고를 해보자고 아이디어를 낸 것이다.
국제복장학원은 전신인 함흥양재학원(38년 개원)의 개원일인 3월3일을 창립기념일로 지켜왔는데 개원30주년 기념행사로 69년3월3일에 입학하는 학생에 한해서는 30년전의 입학금을 그대로 받자는 것이었다.
나는 이 아이디어가 매우 기발하고 재미있다고 생각되어 찬성했다. 그래서 『3월3일 입학자에 한해서 30년전 개원당시 입학금 1원50전을 받습니다』라는 색다른 광고가 신문과 잡지에 실리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과연 효과가 있으려나 반신반의했는데 의외로 반응이 놀라와 그 광고 덕분에 며칠 사이에 학원생이 두배로 늘어나는 이변이 일어났다.
주번에서도 기발한 아이디어라고 칭찬이 대단해서 이 광고는 그후 창립기념일마다 반복되어 큰 인기를 끌었는데 몇년뒤 입학금이 없어지면서 이 색다른 광고도 자연히 사라졌다.
새로 학원을 짓고 이사하는등 큰일을 치르는 동안 몸에 무리가 갔던지 69년 여름 나는 난생처음 20여일간 입원생활을 해야할만큼 크게 건강을 해쳤다.
퇴원한 뒤에도 학원 강의조차 못하고 쉬고 있는 내게 미국으로부터 초청장이 왔다.
재미 한국디자이너협회(KAFDA·당시 회장 김명숙)가 나를 고문으로 추대하면서 총회참석차 도미하기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그해 11월 뉴욕에 가서 미국에서 활동중인 한국인 디자이너들, 특히 국제복장학원 출신 제자들과 만나 모국 패션계와 재미디자이너들간의 보다 긴밀한 교류방법등을 논의했다. 회의가 끝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미국 패션계와 디자인스쿨 현황을 살펴보는 동안 건강도 깨끗이 회복되어 귀국하자 곧 다시 강단에 절 수 있게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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