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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 최고야…" <90>|전국한약재의 집산지 대구 약령시 중구 동성로∼남성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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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대구시 남성로·동성로일대에 오색등과 함께 영기(영기)가 내걸렸다. 골목마다 한약재가 산더미처럼 쌓여있고 향긋한 약내음이 코에 스며든다. 「약전골목」에 장이 선것이다.
가장 오래된 역사와 최대의 약재집산지로 유명한 대구의 명물 약령시-.

<한약재생산 중심지>
약령시는 왕명에의해 개설되었다하여 영시라고도한다. 개설연대는 1650년대로 추정될뿐 정확치않다.
약령시는 매년 봄 가을 두차례에걸쳐 개설됐다. 당초엔 춘령시는음력2월3일부터13일까지 열흘동안 당시 객사(현대안동경북인쇄소일대)에서 열렸고 추령시는 음력10월부터 3일13일까지 열렸다.
약령시가 대구에 개설된 이유는 대구가 한약재 생산의 중심지라는 지역적 특수성 때문이었다.
대구를 중심으로 영주·안동·의성·영천·고령등지는 동양에서도 유명한 한약재 주산지. 건국약재 생산량의 50%를 차지하는데다 대구는 바로 교통의 요충이기 때문이다.
약령시엔 국내산은 물론 중국산까지 수천종의 약재가 등장하게 되는데 조정의 진공(진공)약재 매입이 끝나기 전까진 일반거래가 금지돼 있었다.
조정에선 춘령시때면 개시 첫날 주로 인삼·백출·작약·천남성·산약등을, 추령시땐 구기자·행인·감국·시호·개모향등을 진납받았다고 대구부읍지는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약령시는 1894년 갑오경장으로 조정에서 약재매입이 없어짐에 따라 사양길에 접어들어 1910년대부터는 춘령시가 폐쇄되었다.
무엇보다 약령시가 쇠퇴하게 된것은 일제의 탄압때문이었다. 당시 약재상들이 식자층이었으므로 이들이 정기적으로 모인다는 사실이 총독부의 비위를 거슬렸던 것이다. 따라서 총독부는 약령시를 간접적으로 통제하기위해 「약초채취규칙」을 만들어 약초채취를 막았고 사실상 판매마저 금지시켰다.

<일제탄압, 기능 상실>
그러나 약재상들은 40년대에 들어와 한차례 약령시부활운동을 폈다.
『당시인구 10만명이었어요.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출시자가 16만명이었다면 얼마나 법석거렸을지 짐작이 가겠지요.』
약전골목의 터줏대감인 수성당주인 박종문노인(75)은 약령시에 모이는 사람들 때문에 포목·지물·숙박업·밥장사·술장사가 흥청거렸고 서문시장의 발전도 가져왔다고 한다.
이것도 잠시뿐 2차대전이 일어나고 더욱 심해지는 일제의 탄압으로 시장기능은 완전히 잃고 말았다.
4백여년의 역사를 가진 약령시가 부활된것은 40년만인 1978년10월28일, 조상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과 옛 화려했던 성시의 꿈을 간직한채 약전골목을 지켜왔던 한약방46개소, 한의원18개소, 위탁상회 13개소등이 똘똘뭉쳐 제l회 대구약령시를 개설했던 것이다.

<차츰 옛모습 되찾아
올해로 4번째 맞는 약령시는 해가 거듭될수록 차츰 옛모습을 되찾아가고 있다.
시장이 열리는동안 농악대는 약전골목을 누비며 축제기분을 북돋우고 약재상마다 가게앞에 멍석을 깔고 각종약재를 전시하고있다. 한약방마다 「십전대보탕」등 보신한 약차를 끓여 손님이나 구경꾼등 원하는 사람들에게 무료로 제공하는것도 시장이 열리는동안의 풍습이다.
금년 약령시에 출시된 한약재는 3백여종. 하루 7백여명의 약종상들이 몰려들고 거래량도 평소보다 2∼3배가량 늘어 큰점포는 하루 1백여만원의 매상실적을 올리고있다. 하루평균 총거래량은 3천여만원.
금년 출시약종중 최정상급은 문경 이화령에서 채취한 70년묵은 산삼. 채취자 김억년씨(41)는 『약령시개설 사흘전 꿈속에 현몽을 얻어 산에 올랐다가 이산삼을 캤다』며 『신령의 뜻인것같아 약재전시장에 내놓아 많은 사람들에게 공개키로 했다』고 말했다.
남성∼동성로사이 8백m 약전골목의 한약재상은 45개소. 이제는 그주인들도 대부분 고령이 되었고 세상을 떠난 사람만도 10여명이나 된다.

<공판장의 개설 시급>
『현재 경북도내엔 5백여명의 한약업사가 있읍니다만 면단위에 2명, 동만위에 1명씩 TO제로 묶여있어 영업장소를 옮길수도 없고 나이가 많아 사망할경우 결원이 생길수밖에 없어요.』
한약업사 사복석씨(대구시남성로)는 후진양성과 공판장개설이 시급한 과제라고한다.
『그옛날 국내 한약재 상권을 휘잡고 중국·만주·몽고·일본·동남아등지의 거상들이 잦아들던 그런 약전골목을 만드는게 우리들의 계획입니다.』 대구시한약협회 박재규회장(51)은 한의학의 재기붐을 다고 대구약령시의 국제시장 성립여건이 성숙되었다며 도당국의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두고보십시오. 88년올림픽때는 이곳 약전골목이 분명 관광코스에 들어있을테니까요.』
약전골목을 지켜온 고집스런 한약상들의 또하나의 청사진이었다. <대구=고정웅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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